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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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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통의동 백송은 뉘 집 나무였나?

서울 종로구 옛 천연기념물 백송 터 둘러싼 논란
김정희 옛집으로 알려졌으나, 영조 사저로 확인
등록 2021-10-31 05:32 수정 2021-11-05 02:01
서울 종로구 통의동 백송은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안에 있던 나무였다. 1926년 창의궁이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으로 바뀐 뒤 백송.

서울 종로구 통의동 백송은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안에 있던 나무였다. 1926년 창의궁이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으로 바뀐 뒤 백송.

창의궁은 그 어떤 곳인가/ 어의궁과 같다고 어찌 감히 견줄까/ 용흥궁이라고 부르기엔 덕이 부족하다/ 어필을 걸었으니 만에 하나 감당할까/ 동네는 장의동으로(장한 뜻으로) 다섯 사당을 품고 있다/ 양성헌 일한재는 부왕이 하사한 이름이자 내 이름/ 일청헌 거려사는 몇 년을 받들었나/ 이안와 함일재는 마음을 다스리는 이름/ 옛날부터 있었고 또한 나의 운명이다.(영조 이금, ‘창의궁’ 1774년 7월 하순)

김정희 후손, “월성위궁에 있던 나무”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15번지에는 거대한 백송의 밑동이 남아 있다. 이 백송은 한국에서 가장 크고 나이 많은 백송으로 1962년 천연기념물 4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1990년 큰비와 강풍에 쓰러져 죽었고, 1993년 천연기념물 지정도 해제됐다. 오랫동안 이 백송은 이 일대의 수호신처럼 여겨졌고, 1955~1970년엔 이 백송이 있는 통의동에 ‘백송동’이란 행정동 이름이 붙기도 했다.

이 백송은 오랫동안 추사 김정희의 집에 있던 백송으로 여겨졌다. 김정희 연구자인 김영호 경북대 교수는 1976년 쓴 답사기 ‘추사의 붓을 따라 천 리를’에서 이 백송이 김정희의 집인 월성위궁에 있던 나무라는 김정희 방계 후손의 증언을 인용했다.

“최근 김익환 옹(완당 김정희 선생의 친동생 김상희의 5대 혈손이며 일제 때 <완당선생문집>을 편찬한 분)을 찾아가 뵙고 완당 선생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완당 선생의 서울 고택 월성(위)궁의 위치를 물었더니 통의동의 백송 고목이 있는 곳이 완당 선생 고택의 정원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 증언을 바탕으로 2002년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완당 평전 1>에서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던 동네에 월성위궁을 내려주었다. 월성위궁은 궁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대한 저택으로 백송나무가 이 집의 정원수였다고 한다”고 썼다. 월성위(경주 김씨 사위)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이다. 유 전 청장은 2018년 펴낸 이 책의 증보판 <추사 김정희>에서도 같은 내용을 썼다. 이 영향인지 현재까지 네이버와 다음 지도에서는 통의동 35-15번지 백송 터 부근을 ‘김정희 선생 집터’라고 표시한다.

미술사학자 최열은 2021년 김정희의 삶과 예술, 학문을 집대성한 <추사 김정희 평전>에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백송은 원래 창의궁에 있었고, 월성위궁은 그 창의궁의 일부라는 주장이다.

“창의궁 안에는 600년 넘게 자란 백송이 있었다. (…) 창의궁은 숙종이 (아들) 영조에게 주어 영조가 즉위하기 전 머무르던 잠저가 되었다. 영조는 둘째 딸 화순옹주가 월성위 김한신과 혼인하자 창의궁 일대의 가옥을 하사했는데, 바로 그 집이 월성위궁이었다. 물론 창의궁 전체를 주었는지 아니면 일부를 떼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90년 큰비와 강풍으로 쓰러진 백송.

1990년 큰비와 강풍으로 쓰러진 백송.

이순우 “옛 지도 보면 창의궁 안에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제시돼왔다. 2007년(초판), 2019년(증보판) 대통령경호처에서 펴낸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이란 책에선 창의궁과 백송은 통의동에, 월성위궁은 적선동에 있었다고 썼다. 이 책을 보면, 1770년께 만든 <한양도성도>에 창의궁 남쪽에 별도로 월성위궁이 표기돼 있다. 이 책의 출판을 주도한 이성우 대통령경호실 전 안전본부장은 “옛 지도와 길을 살펴보면, 백송 터는 명확히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 안에 있고, 김정희 본가인 월성위궁은 창의궁 아래 서십자각 옆에 있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 다른 공간”이라고 말했다.

2013년 문헌학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도 이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자료를 공개했다. 먼저 고종 시절인 1865~1883년 나온 <동국여지비고>를 보면, ‘화순옹주의 사당은 서부 적선방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이 사당은 당연히 화순옹주의 집(월성위궁)에 마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선방은 현재의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남쪽에서 새문안길에 이르는 지역이다. 반면 창의궁은 북부 의통방(또는 순화방)에 있었다. 두 지역은 현재의 자하문로2길로 나뉜다.

월성위궁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시한 지도와 기록도 제시됐다. 1903년 <한국 경성 전도> 지도엔 경복궁 서십자각 모서리에 ‘월궁후동’이란 지명이 적혀 있다. 1914년 <경성부 시가 경계도> 지도에도 같은 위치에 ‘월궁동’이란 지명이 적혀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 관보>의 ‘경기도고시 제7호’엔 월궁동과 사온동, 장흥고동 등을 합해 적선동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월궁은 월성위궁의 줄임말이다.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백송 터 논란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1976년 김정희의 후손이 백송 있는 곳이 김정희의 월성위궁이라고 잘못 말했다. 1987년엔 서울시가 김정희가 살던 월성위궁 터 표지석을 창의궁 터에 잘못 세웠다. 또 김정희가 중국에서 가져다 고향 예산의 조상 무덤 앞에 심은 백송과 통의동 백송이 혼동을 일으킨 것 같다.”

창의궁은 숙종이 아들 영조(당시 연잉군)에게 주기 위해 1707년 마련했다. 그 전엔 숙종의 넷째 고모인 숙휘공주와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집이었다. 영조는 1712년부터 1721년까지 9년 동안 살았다. 이 사저 시절에 연잉군은 두 아들과 한 딸을 얻었고, 어머니를 잃었다. 왕이 된 뒤에도 100차례 이상 창의궁을 찾아갔다. 영조에겐 어머니의 집 같은 곳이었다.

영조 이후 창의궁엔 영조의 아들과 손자, 정조의 아들, 순조의 아들 사당이 설치됐다. 그러나 1900년께까지 창의궁의 사당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창의궁은 1908년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로 넘어갔고, 1911년엔 동척 사택이 들어섰다. 1917년 기록을 보면, 동척 사택이 들어선 통의동 35번지의 넓이는 2만1094㎡(6381평)였다. 이 35번지는 해방 뒤 민간에 팔려 100개 이상의 필지로 나뉘었다.

현재 밑동만 남아 있는 백송.

현재 밑동만 남아 있는 백송.

최근 창의궁·월성위궁 표지 바로잡혀

월성위궁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1732년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한 뒤 궁을 떠난 1734~1735년께 마련됐다. 1758년 김한신이 죽고 화순옹주가 따라 죽자 이들의 사당이 설치됐다. 또 이들의 양아들 김이주, 양손자인 김노영, 양증손자인 김정희가 80년가량 살았다. 그러나 김정희가 1840년 제주로 유배된 뒤 이 집은 몰수됐고, 월성위 부부 사당만 고종 때까지 유지됐다.

현재 ‘창의궁 터’ 표지는 종로구 통의동 35-23번지에 있고, 서울시의 `‘김정희 본가 터’ 표지는 종로구 적선동 8-4번지에 있다. 표지 위치가 바로잡혔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이순우, ‘창의궁 자리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집터라는 얘기에 대한 예비적 재고찰’, 2013
대통령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2007·2019
최열, <추사 김정희 평전>, 돌베개, 2021
홍순민, <영조, 임금이 되기까지>, 눌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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