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웃 나라들(중국과 일본)은 최근 서양과 외교를 맺은 일을 계기로 좋지 않았던 과거를 다 묻어버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이웃 나라들의 이런 태도는 단순히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는 현명한 계략에서 비롯한 행동이다. 군사력이 약한 우리로서도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움직임을 본받아 서양의 침략에 굳건한 대비를 해둬야 할 것이다.”(고영주, <치상집> 중 ‘유학 가기에 대한 논의’)
2013년 5월 서울시는 종로구 필운동 88-1번지 한옥 5동과 우물 등을 시 민속문화재로 지정했다. ‘필운동 홍건익 가옥’이었다. 홍건익은 1934년 이 집(터 467평)을 매입해 1935년 기존 집(건평 67평)을 허물고, 1936년 새 집(건평 91평)을 지었다.
당시 서울시 고시를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1912년 첫 조사 때는 이 집의 주인이 ①고영주(1840~1914년 이후)였고 1918년까지 소유했다. 고영주는 조선 말기의 중국어 역관이자 고위 관리였으며 개화파였다. 그의 영향으로 동생들도 모두 개화파로 활동했다. 고영주 집안은 아버지 고진풍이 1828년 중국어 역관이 된 뒤로 역관 집안이 됐다. 고진풍의 네 아들 중 고영주와 ③고영선(1850~?), ④고영철(1853~1911)은 중국어 역관이 됐고 ②고영희(1849~1916)는 일본어 역관이 됐다. 개화기는 역관들의 시대였다. 역관은 외국과의 관계에서 강점을 발휘했고, 국내에서도 출세길이 열렸다. 허경진 연세대 객원교수는 “과거엔 역관들이 역관 직군에서만 고위직에 올랐으나, 개화기엔 일반 직군에서도 고위직에 올랐다. 고영주 집안이 대표적인 경우다”라고 말했다.
①고영주는 중인 중심 개화파 모임이던 육교시사(광통교 시모임)의 멤버였다. 김정희의 제자이자 개화파 지도자, 유명 시인이던 강위(1820~1884)가 주도한 육교시사에 고영주와 고영선, 고영철 등 삼 형제가 참여했다. 이 형제들의 활약은 강위가 펴낸 <육교연음집>(광통교 공동시집)의 편집자가 고영철이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고영주와 가까웠던 육교시사의 멤버 중 김경수(1818~?)는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준 애제자 이상적의 처남이었다. 고영주는 김경수가 엮은 <공보초략>의 서문을 썼다. 김석준(1831~?)도 가까웠는데 역시 김경수처럼 김정희와 이상적, 박규수(박지원의 손자)의 큰 영향을 받았다. 고영주는 김석준의 시집 <속회인시록>에도 서문을 썼다.
고영주는 중국어 역관으로 시작해 1895년 전후로 개성부 판관과 개성부 관찰사, 1896년 전후엔 개성부 재판사와 중추원(의회) 1등 의관(의원)을 지냈다. 또 1907년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14년엔 빈민을 구제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젊은 시절 강위 등과 함께 꿈꾼 사회개혁은 실행하지 못했다.
고영주의 영향으로 동생들도 개화 물결의 맨 앞에 섰다. ④막내 고영철은 중국어 역관으로 1881년 김윤식 사절단(영선사)의 장학생으로 중국 톈진에서 유학했다. 여기서 그는 조선 역사상 첫 영어 역관이 됐다. 1882년 조선으로 돌아온 뒤 영어를 가르치는 동문학에서 일하면서 첫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1883년엔 민영익 사절단(보빙사)에서 홍영식의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시대는 고영철의 편이 아니었다. 조선에서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고영철은 말년에 중국어와 영어가 필요 없는 경상도 봉화군수, 강원도 안협군수 등 지방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이 프랑스어 역관이자 첫 서양화가인 고희동이고, 고희동의 외손자가 이상돈 전 의원이다.
형제 중 기회를 잡은 사람은 고영주의 동생이자 고영철의 형이던 ②고영희였다. 일본어 역관이던 고영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인천으로 도피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도운 인연으로 일본과 각별해졌다.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확실해진 1895~1905년 고영희는 여러 차례 협판(차관)을 지냈다. 1907~1910년엔 대신(장관)을 지내면서 1907년 정미7조약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그는 나라를 팔아넘긴 대가로 일제 때 중추원 고문과 자작으로 지냈다. 그는 2006년 한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고영희의 아들인 고희경(1873~1934)도 아버지를 따랐다. 특히 고영희는 일본의 지도자이자 조선 침략의 선봉이던 이토 히로부미와 가까웠다. 1907년 이토의 주도로 영친왕 이은이 일본 유학을 떠날 때 동행해 1926년까지 함께 일본에 머물렀다. 이은의 비서실장 격이었지만, 사실상 감시자였다. 1926~1934년엔 중추원 고문도 지냈다.
고희경은 1916년 아버지 고영희의 자작을 세습했고 이 작위는 아들 고흥겸, 손자 고중덕으로 이어졌다. 나라를 판 대가로 4대가 일본 귀족을 지낸 것이다. 고희경도 아버지에 이어 2007년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고영주·고영희·고영철 삼 형제는 개화기에 가장 성공한 중인이었다. 고영철의 외증손자인 이상돈 전 의원은 “삼 형제 가운데 고영주·고영희는 고급 관리를, 고영철은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고영주·고영철과 고영희의 삶엔 큰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언어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고영주가 1918년 매각한 필운동 집엔 을사늑약에 반대했던 한규설의 외손자 심재홍도 1929~1934년 살았다. 1905년 이토와 상의해 한규설을 수옥헌(중명전)의 한 방에 가둔 사람은 고영희의 아들 고희경이었다. 고영희와 고희경 부자의 집도 고영주의 집에서 가까웠다. 고영희는 종로구 옥인동에서 살았고, 고희경은 통인동에서 살았다.
홍건익 가옥이 고영주의 집터였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허경진 교수는 “역사상 이 집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영주였다. 그의 이름을 문화재 명칭이나 설명에 포함해야 한다. 이 집을 중인자료관으로 활용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이희숙 역사문화재과장 직무대리는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고영주의 집을 허물고 홍건익이 새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문화재 명칭을 바꾸긴 어렵다. 다만 고영주의 집터였다는 점을 문화재 설명에 포함하는 방안을 시 문화재위원회에서 논의해보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송만오, ‘고영주와 그 형제들의 개화 활동에 관한 일고찰’, 2004
허경진, ‘고영주 가옥의 중인자료관 활용 방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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