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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연암 박지원과 친구들, 청계천에서 놀다

조선 후기 두 개의 금기를 깬 백탑파와 그들의 활동 무대
등록 2021-07-17 17:10 수정 2021-07-21 14:03
영조가 청계천을 준설한 18세기 후반부터 광통교와 수표교 주변 지역은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19세기 말 고종 행차 때 광통교 모습. 경기도박물관

영조가 청계천을 준설한 18세기 후반부터 광통교와 수표교 주변 지역은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19세기 말 고종 행차 때 광통교 모습. 경기도박물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광통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옛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유연이 이 다리 위에서 춤추고 나서 이홍유의 집에서 차를 마셨다. 혜풍 유득공이 장난삼아 거위를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다.”(박지원, ‘취해 운종교를 걷다’, <연암집> 하)

2000년대 초 150m 상류로 옮겨진 현재 광통교의 모습. 류우종 기자

2000년대 초 150m 상류로 옮겨진 현재 광통교의 모습. 류우종 기자

광통교 난간에 기대어

1781년 7월13일 밤 서울 새문(서대문) 밖 평계(종로구 평동)에 있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집에 박제가의 형 박제도가 이덕무, 이희경 등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당시 호조참판이던 서유린이 먼저 와 있었다. 박제도와 서유린은 친분이 없어 서로 데면데면 앉아 있다가 결국 박제도가 먼저 일어났다.

한참 뒤 박제도가 박지원에게 심부름 아이를 보냈다. “손님(서유린)이 이미 떠났을 거라면서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면 술을 마시려고 한답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서유린은 웃으며 “나를 쫓아내려 하는군요”라고 말하고 떠났다. 다시 만난 이들은 술을 마신 뒤 운종가(구름처럼 모이는 거리, 종로1가 네거리) 종각 쪽으로 가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박지원이 청계천 광통교 난간에 기대어 옛일을 이야기했다. 6년 전 일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1770년대에 박지원은 탑골공원 근처 전의감동(전동, 서울 종로1가 종로타워 부근)에 살았다. 이사한 1768년부터 가족과 함께 황해도 연암골로 들어간 1778년까지 10년가량이었다. 이때 박지원은 당대에 ‘백탑시사’(흰 탑 시모임), 나중에 ‘북학파’라고 불린 친구들과 어울렸다. ‘백탑’은 당시 서울의 초고층 랜드마크였던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한다.

박지원은 이 모임의 활동 이야기를 두 군데 남겼다. 자신의 <연암집>엔 ‘여름날 밤 잔치’라는 글을 남겼고, 다른 이야기는 아들 박종채가 <과정록>(번역본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 썼다. 그중에서 눈 오는 밤, 청계천 수표교 위에서 술을 마시고 구라철현금(유럽철현금, 양금)을 연주한 일을 적은 <과정록>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이 시절, 박지원을 비롯한 백탑파의 청계천 활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래 조선 시대에 청계천 주변은 5부 가운데 ‘중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대부가 거주하거나 활동하지 않았다. 개천가였기 때문에 평민이나 빈민이 많이 살았다.

그런데 1760년 영조가 청계천을 대규모로 준설했다. 그해 2~4월 연인원 21만 명을 동원해 청계천에 쌓인 모래를 파내고 청계천 양쪽에 돌로 제방을 쌓았다. 이 사업으로 청계천에서 홍수 위험이 낮아졌고 위생 상태도 개선됐다. 이 대규모 준설은 청계천을 도성 안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2000년대 초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이 청계천에서의 활동과 주변 재개발을 촉진한 일과 비슷했다.

조선 후기에 광통교는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의 명소였다. 오계주의 <상원야회도>(대보름 밤 모임).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후기에 광통교는 정월 대보름 다리밟기의 명소였다. 오계주의 <상원야회도>(대보름 밤 모임). 서울역사박물관.

문화 중심지로 떠오른 청계천

청계천 준설 이후의 변화는 조선 시대 문헌에도 잘 나타난다. 이를 그려낸 글이 바로 강이천의 <한경사>(서울노래)다. <한경사>는 모두 106편의 연작시로 18세기 말 서울 풍경을 잘 묘사했다.

당시 청계천 주변엔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 먼저 그림 거래가 활성화했다. 그림의 상업화는 조선 후기 경제 발전으로 중인과 평민 등 새로운 그림 소비자가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그 이전 그림의 소비자는 오직 양반뿐이었다. 원래 광통교 주변인 구리개(을지로입구역) 부근에 도화서(그림관청)가 있었는데, 준설 이후 광통교 주변에 종이가게와 지물포, 그림가게, 서화실 등이 많이 들어섰다.

둘째로 광통교와 수표교 일대 청계천은 닭싸움, 타구(장치기, 하키)의 현장이었다. 특히 닭싸움은 단순한 오락에서 내기(도박)로 이어져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셋째는 광통교, 수표교 일대가 놀이의 중심지가 됐다. 다리밟기와 연날리기, 팽이치기 등 전통 놀이가 활성화했고 음식점이나 술집, 찻집 등 근대적 소비 시설도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 박지원과 백탑파 친구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두 가지 금기를 깼다. 하나는 청계천이 수준 낮은 지역이라는 인식을 깨고 자신들의 산책이나 연주, 음주, 가무 등 활동 무대로 삼았다. 둘은 계급적 장벽을 뛰어넘었다. 박현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부장은 “백탑파 가운데 박지원과 홍대용, 이서구는 집권 노론의 자제였지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서자였다. 이들은 신분을 넘어 어울렸다”고 말했다.

나중에 이들은 북학파로 새로 태어났다. 앞장선 인물은 가장 나이가 많은 홍대용(1731~1783)이었다. 홍대용은 1765년 연경(베이징)에 다녀왔고, 3대 연행록으로 꼽히는 <을병연행록>(한국어본)을 썼다. 그의 연행 경험은 그 뒤에 연행을 떠난 박지원과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에게 큰 영향을 줬다. 홍대용은 천문, 경제, 음악, 교육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났다.

박제가와 유득공도 1778년 연행을 다녀왔다. 박제가는 가장 강력한 개혁론자로 <북학의>를 썼으며, 경제와 과학기술 발전을 역설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써서 통일신라 시대를 발해와의 ‘남북국 시대’로 새롭게 정의했다. 두 사람과 이덕무, 서이수 등 4명의 서자는 정조 시절 규장각 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박지원은 가장 늦은 1780년 연행을 다녀와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를 썼다. <열하일기>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학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박지원은 이 밖에 <양반전> 등 10여 편의 사회 비판 소설도 썼다.

그러나 청계천을 배경으로 개혁을 꿈꾼 이들 백탑파의 원대한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들은 정조 이후 왕들을 계몽군주로 바꾸지 못했고, 스스로 개혁 주체가 되지도 못했다. 북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 개혁은 이들이 쓴 책 속에서 끝났다.

20세기 초 수표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20세기 초 수표교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1959년 청계천 복개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현재 수표교의 모습. 류우종 기자

1959년 청계천 복개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현재 수표교의 모습. 류우종 기자

2000년대 청계천 복원 이후

이들의 활동 무대였던 청계천 광통교는 2000년대 초 청계천 복원 과정에 150m 상류 쪽으로,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 과정에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광통교와 수표교를 박지원이 거닐었던 원래 자리로 다시 옮길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아 보인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동준, ‘18세기 문인 야연의 현장과 예술적 아우라’, 2014

박지원, <연암집>, 돌베개, 2007

서울역사박물관, ‘탑골에서 부는 바람 백탑파 이야기’, 2000

서정화, ‘광통교, 조선 후기 한양의 핫플레이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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