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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이방원의 복수, 이방원의 유산

조선 첫 왕비 신덕왕후 일가의 멸문지화… 광통교와 정릉, 서얼 차별에 깊이 새겨져
등록 2022-01-02 01:09 수정 2022-01-14 00:03
광통교는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난간석과 병풍석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광통교 난간 기둥 가운데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광통교는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난간석과 병풍석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광통교 난간 기둥 가운데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의정부에서 보고했다.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니, 밖으로 옮기게 하소서.’ (왕이) 그대로 따랐다. 정릉을 도성 밖 사을한(현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옮겼다.” (<태종실록> 1409년 2월23일)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보고했다.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정릉 옛터의 돌로 다리를 만드소서.’ (왕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1410년 8월8일)

“서선 등 6인이 제안했다. ‘종친과 각 품계의 서얼 자손은 높은 직책에 임명하지 말아 본처와 첩을 분별하소서.’ 육조에서 의논해 제안대로 시행하자고 결론 내렸다. 왕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1415년 6월25일)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몹시 사랑했다. 강씨는 이성계보다 21살이나 어렸고, 조선 건국으로 가는 고비마다 이성계의 결단을 도왔다. 1392년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도 정도전과 함께 친모인 강씨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1396년 강씨가 40살로 세상을 뜨자 이성계는 도성 한복판인 취현방(현재의 정동)에 정릉을 조성하고 그 옆에 흥천사라는 절까지 지어 아침저녁으로 강씨의 명복을 빌었다.

광통교의 교대석(버팀벽돌) 상당 부분은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병풍석이다. 광통교에 사용된 병풍석에 새겨진 신선과 구름의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광통교의 교대석(버팀벽돌) 상당 부분은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병풍석이다. 광통교에 사용된 병풍석에 새겨진 신선과 구름의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1차 ‘왕자의 난’의 골육상쟁

그러나 강씨에 대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은 결과적으로 이성계와 강씨에게 거대한 재앙을 가져왔다. 이성계의 최대 실수는 1392년 건국 직후 10살짜리 막내아들 방석을 덜컥 세자로 세운 일이었다. 1398년 8월26일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인 데 이어 강씨의 아들 방번, 방석, 강씨의 사위인 이제를 모두 죽였다. 강씨의 딸 경순공주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됐다. 이날 강씨가 죽임을 면한 이유는 2년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도성 한가운데 있던 강씨의 정릉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아버지 이성계가 아직 태상왕으로 살아 있던 1406년 4월 의정부에서 이런 요청을 올린다. “정릉이 서울 안에 있는데도 영역이 너무 넓으니 능에서 1백 걸음 밖엔 집을 짓도록 허락해달라.” 이방원의 뜻에 따른 요청이었다. 이방원은 즉시 허락했다. 그러자 최측근인 좌의정 하륜이 사위들을 데리고 와서 정릉 주변 땅을 차지했다.

한 달 뒤 5월 태상왕 이성계는 정동(정릉동의 준말)의 정릉과 흥천사에 찾아가 한없이 울었다. 자신이 사랑한 강씨의 무덤 주변 소나무가 마구 잘리고 하륜 등의 집이 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08년 5월 이성계가 죽자, 이방원은 1409년 2월 정동의 정릉을 파헤쳐 강씨의 주검을 도성 밖 사을한(현 정릉동)의 산기슭으로 내쳤다. 아버지 이성계가 정성 들여 조성한 무덤의 병풍석과 난간석 등은 옮기지 않았다. 새 정릉으로는 장명등(돌등)과 혼유석(상석) 등 최소한만 옮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태조 시절 가장 아름답게 꾸며졌던 정릉은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는, 조선 왕릉 중 가장 초라한 무덤으로 떨어졌다.

이방원의 복수를 당한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문화재청 제공

이방원의 복수를 당한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엔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문화재청 제공

정릉, 도성 밖으로 쫓겨난 초라한 무덤

이방원은 두 달 뒤인 1409년 4월엔 옛 정릉의 정자각(제사용 건물)을 허물어 근처 태평관(중국 사신 접대시설)을 새로 짓도록 했다. 옛 정릉의 봉분은 없애고 문무석인은 땅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1410년 8월엔 옛 정릉에 남아 있던 무덤돌들을 큰비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를 다시 놓는 데 쓰도록 했다. 현재 150m 상류로 이전된 광통교의 난간석과 교대석(버팀벽돌) 일부는 1410년 정동의 정릉에서 가져온 돌들이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이 무덤돌들의 아름다운 조각은 이성계가 정릉에 들인 정성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광통교는 한양의 제1대로(경복궁~광화문 네거리~종로1가~숭례문)에 놓인 다리였고, 주변에 시장이 마련돼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른바 ‘운종가’(구름처럼 모이는 거리)였고, 광통교의 다른 이름도 ‘운종교’였다. 이방원은 서울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거리에 강씨의 무덤돌로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 이 다리가 1410~1412년께 세워졌으니 2022년이면 610년째 짓밟히는 중이다.

이방원의 복수는 끝이 없었다. 강씨를 왕비에서 후궁이나 폐비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1412년 강씨의 기제사를 서모와 형수, 제수 격으로 낮췄다. 1416년엔 신하들에게 강씨는 자신의 계모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1418년 상왕 시절엔 강씨의 기제사를 왕실이 아니라 강씨 가족이 치르도록 했다. 아예 강씨를 왕실에서 내쫓은 것이다. 이방원 사후인 1426년 아들인 세종 이도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강씨의 반신 영정을 고려 왕과 왕비의 초상과 함께 태워버렸다.

이방원이 조성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엔 병풍석과 난간석(점선)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방원이 조성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엔 병풍석과 난간석(점선)이 있다. 문화재청 제공

479년이나 이어진 서얼 차별의 뿌리

태종 시절에 확립된 서얼 차별이 강씨의 아들들에 대한 복수였다는 평가도 있다. <태조~태종실록>에선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들에 대해 ‘적자’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 대신 ‘서자’(10번, 양민 첩의 아이)와 ‘얼자’(8번, 천민 첩의 아이), ‘서얼’(7번, 서자+얼자), ‘유자’(1번, 어린아이), ‘고아’(1번)라는 표현을 썼다. 강씨는 이성계의 첩이 아니라 둘째 부인이었고, 후궁이 아니라 조선 첫 왕비였다. 방번과 방석은 배다른 적자 동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

정도전에 대해서는 조상 중에 천민이 있었다는 주장까지 <실록>에 적었다.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1398년 8월26일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엔 “정도전 외할머니의 아버지인 김전이 종 수이의 아내와 간통해 낳은 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천민이므로 그 손자인 정도전도 천민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역사학)는 “이 이야기는 정도전의 생전엔 없던 것으로 사후에 꾸며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방원이 시작한 서얼 차별은 조선 후기에 국가적 쟁점이 됐다. 1695년 서얼 988명(천인소)의 상소를 시작으로 1823년 9996명(만인소)의 상소가 쏟아졌다. 그러나 결국 조선 왕조는 1894년 갑오개혁에서야 떠밀리듯 이 문제를 풀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일제가 조선의 지배권을 쥔 뒤에야 신분 차별을 폐지한 것이다. 479년 만에, 너무나도 늦게 온 개혁이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박경남, ‘16, 17세기 서얼 허통 상소문 연구’, 2013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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