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추 등이 보고하기를, ‘신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 여러 곳에 나아가서 산수를 살펴봤으나 도성을 건설하기에 합당하지 않았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의 남쪽은 산 모양과 물의 흐름이 옛 문서와 부합합니다’” -<고려사절요> 숙종 6년 1101년 10월
최근 대통령실 이전으로 국방부가 있는 서울 ‘용산’(龍山)이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 용산은 한국 역사에 수없이 나오는 그 용산이 아니다. 대통령실이 이전한 국방부 일대는 역사적으로 ‘용산’이 아니라 ‘둔지산’(둔지미) 지역이었다. 조선의 행정구역상 둔지산이 있던 ‘둔지방’과 용산이 있던 ‘용산방’은 완전히 별개 지역이었다.
역사에 나오는 진짜 ‘용산’은 만리재 부근에서 시작해 효창원을 거쳐 용마루고개, 용산성당, 청암동에 이르는 2.7㎞의 긴 산줄기다. 긴 산줄기 끝이 한강 쪽으로 머리를 내민 모습이 용과 같다고 해서 용산이었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의 지도를 보면, 용산의 최고봉은 용산성당 부근으로 해발 77m 높이다.
용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01년 고려가 남경(남쪽 수도)을 정할 때다. 당시 용산은 한양(4대문 안), 노원(노원구 일대), 해촌(도봉구 일대)과 함께 경쟁했으나, 결국 한양에 남경 자리를 내줬다. 당시 네 후보지 가운데 한양(삼각산)과 노원(수락산·불암산), 해촌(도봉산)은 모두 산을 배경으로 했으나, 용산만은 강을 배경으로 한 입지였다.
용산이 다시 <고려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24년 뒤인 충숙왕 12년(1325년) 8월이다. 당시 왕은 원나라 황족 출신 왕비(조국장 공주)와 함께 용산에 가서 천막을 치고 머물렀다. 왕비의 출산을 위한 일이었다. 10월에 왕비가 아들을 낳자 ‘용산원자’(용산에서 낳은 맏아들)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왕비가 산후병으로 18살 나이에 숨졌다.
용산에 대해선 고려 사대부들도 여러 글을 남겼다. 당시부터 용산은 개경에 살던 고려 왕족이나 사대부들에게 널리 알려진 명승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의 유명 학자 이인로(1152~1220)는 ‘용산 한언국의 서재에서 묵다’라는 시를 지었다. 한언국은 기록상 용산에 별서(별장)를 운영한 최초 인물이다.
이인로는 그 시 서문에서 용산과 주변 풍경을 자세히 그렸다.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은데, 서재가 바로 그 이마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 두 갈래가 되고, 강 밖에는 멀리 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산(山) 글자 같다.” ‘산이 이무기 같다’는 말은 용산의 긴 산세를 표현한 것이다. ‘서재가 그 이마에 있다’는 서재가 한강과 만나는 용산 언덕 끝에 있다는 뜻이다. ‘강물이 나뉜다’는 한강 본류와 여의도 샛강을 말한 것이고, ‘멀리 산 글자 같다’는 관악산을 이른 것이다.
고려 말 이색, 길재와 함께 ‘3은’으로 불린 이숭인(1349~1392)은 용산에 ‘추흥정’을 지었다. 그 기문(기록문)에 용산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용산은 원래부터 강산이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 토지가 기름져서 오곡이 잘되며 강엔 배가 다니고 육지로 수레가 통한다. 이틀 낮밤이면 개경에 갈 수 있어서 귀인들이 별장을 많이 마련해뒀다.”
조선 들어서서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담담정’이 유명했다.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안평대군은 남호(용산강)에 임하여 담담정을 지어 만 권의 책을 모아뒀다. 선비들을 불러모아 12편 풍경시를 지었으며, 48편 시를 지었다. (…) 늘 술 마시고 놀았다.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로서 교분을 맺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담담정은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안평대군이 죽은 뒤 배신한 벗 신숙주에게 넘어갔다. 담담정은 허물어졌다가 나중에 선조의 손자 유천군 이정(1674~?)이 옛터에 다시 지었다. 담담정 위치는 지금의 벽산빌라 부근으로 추정된다.
용산엔 현재의 공무원 연수원 같은 ‘독서당’도 있었다. 성종 때인 1493년 용산 언덕에 독서당을 마련하고 ‘사가독서’(연수휴가)를 줘서 젊은 선비들을 공부하게 했다. 이곳이 바로 ‘남호 독서당’이다. 남호 독서당은 1504년 연산군이 폐지했고, 1515년 옥수동에 ‘동호 독서당’이 새로 문을 열었다.
1777년 용산의 벼랑에 세워진 ‘읍청루’도 유명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은 “읍청루는 용산강에 있는 훈련도감 소속 별영창의 누각이다. 앞에 길게 강이 있어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소개했다. 읍청루는 용산의 맨 끝에 있어 동쪽으로 용산나루, 서쪽으로 마포나루 등 한강 풍경을 즐기기 좋았다.
정조 이산이 1795년 3월 읍청루에 올라 지은 시도 전한다. “남쪽으로 읍청루에 나오니 속이 확 트이고/ 살구꽃 핀 봄에 큰 강 앞에서 술을 마신다/ 정신없는 나루터 길손 몇몇을 웃으며 보니/ 강가 한쪽에서 하루 내내 서성대는구나”
용산은 한강의 대표적 나루였기에 정자와 함께 물류 창고 지역으로도 유명했다. 먼저 1410년 군대 물자를 관리하는 군자감의 강감(한강 지부)이 용산에 설치됐다. 현재의 용산 케이티(KT) 자리다. 이 용산 강감 창고의 규모는 84칸이었고, 곡식을 30만 섬이나 저장했다. 1596년 용산 강가에 훈련도감 별영창을 추가 설치했다.
1661년엔 대동법에 따라 걷은 쌀을 관리하는 선혜청의 창고인 ‘선창’을 현재의 성심여고 뒤쪽 언덕에 지었다. 그 뒤 백범로 용마루 고개 부근에 ‘만리창’이란 58문의 대규모 새 창고도 들어섰다. 이 만리창에서 ‘새창고개’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2022년 5월16일 용산학연구센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한국땅이름학회,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등 11개 시민단체와 학회는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용산과 둔지산에 제 이름과 제자리를 찾아주자는 내용이었다.
1905년 일제는 조선 주둔군 사령부를 둔지산 지역(현 국방부와 미군기지)에 설치하면서 이곳에 ‘용산’이란 잘못된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둔지산을 용산이라 부르고, 진짜 용산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됐다.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은 “새 대통령실 설치가 용산과 둔지산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둔지산에 있는 새 대통령실 이름에 ‘용산’이란 지명을 포함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영상, <서울 육백년5-한강·한강 유역>, 대학당, 1996
김천수,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청, 2016
유본예 지음, 박현욱 옮김, <역주 한경지략>, 민속원, 2020
이순우,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2-효창원과 만초천 주변>, 민족문제연구소, 2022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혜화1117, 2020
*김규원의 역사 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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