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여행하고 왕래하는 데 무릇 수로나 육로의 험하고 평탄함에 따라 나아가고 피하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를 말미암아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 강폭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니 모두 내 글을 따라서 취하는 것이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김정호, <대동여지도> 머리글 ‘지도유설’)
2022년 5월20일부터 8월7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명품도시 한양 보물 100선’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20년을 기념하는 이번 전시회엔 <용비어천가> 등 보물 15점, 유형문화재 25점 등 귀중한 작품이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 1864년)와 <동여도>(1857년으로 추정)다. 이들 지도의 특별한 점은 그 크기에 있다. <대동여지도>나 <동여도>는 22첩(22개의 가로 접이식 책)으로 돼 있는데, 모두 펼쳐서 붙였을 때 높이 6.6m, 너비 4m에 이른다. 현재 <대동여지도>는 30질가량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크기 때문에 상설 전시하는 곳이 없다. 6.6m는 2층 건물 높이이고, 넓이도 26.4㎡(8평)나 차지한다.
<대동여지도>에 실린 지명 등 단어 정보는 대략 1만3천 개나 된다. <동여도>는 1만9천 개, <청구도>(1834년)는 1만5천 개의 단어가 적혀 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찍어서 단어 정보가 비교적 적게 들어갔고, 대신 14개의 기호를 많이 사용했다. 반면 <동여도>나 <청구도>는 필사본이어서 더 많은 단어가 들어갈 수 있었다. 박현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부장은 “인공위성 같은 과학기술이 없을 때 어떻게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들었는지 놀랍다. 지도에 담긴 정보량도 엄청나다”고 평가했다.
김정호는 이 작업을 거의 혼자서 했다. 방대한 자료를 수집, 검토했고, 직접 지도를 그리고 글씨를 썼다(<청구도> <동여도>). 또 이들 지도를 바탕으로 목판을 새겨 지도를 찍어냈고(<대동여지도>), 이 3개 지도를 모두 11개 판본으로 계속 개선했다. 그 밖에 다른 지도와 3종의 지리지도 만들었다. 혼자서 이런 초인적인 일을 해낸 지도학, 지리학의 거인이었다.
그는 왜 지도를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서울역사박물관의 김양균 전시과장은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지를 보면, 그가 뛰어난 식견을 가진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학자로서 이전의 자료들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집대성했다”고 말했다.
이상태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도 “19세기엔 중국을 통해 유클리드의 기하학까지 조선에 들어왔다. 서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많았고, 김정호도 그런 모임에서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 공부를 통해 더 발전된 전통 지도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가 정부의 군사, 행정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수도방위사령관), 총융사(수도북부사령관) 등을 지낸 무관 신헌과의 관계가 그 근거다. 신헌은 문집 <금당초고>의 ‘대동방여도서’에서 “나는 일찍이 우리 지도(동여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 (…) 등을 모아 편집했다. 이것을 김백원(김정호)군과 의논하고 그에게 위촉해 완성했다. (…) 비로소 한 부를 완성했는데, 전체가 23권이었다”라고 썼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 고위 무관인 신헌이 김정호에게 비변사(국가안전보장회의)와 규장각(국립도서관)의 문서를 제공한 것이다. 정부의 공식 사업은 아니었더라도 신헌과의 관계를 볼 때 정부의 군사·행정 목적을 위한 지도 제작이었을 수 있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 사업자였다는 의견도 있다. 이른바 방각본(민간 목각본) 출판이다. 그가 만든 지도나 지리지의 종류와 판본이 다양했기 때문이다. 이기봉 국립중앙도서관 연구관은 “김정호는 그 이전 정상기나 신경준의 지도를 제품화한 사람이다. 소수의 양반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제품을 만들고 개선했다. 전근대 시대에 손꼽을 만한 기업가형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김정호는 이 많은 지도와 지리지를 만드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이상태 전 실장은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의 4개 판본이 모두 최한기한테 갔다. 최한기가 김정호의 재정적 후원자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방각본 출판업자였다면 재정적 후원은 필요하지 않다. 이기봉 연구관은 “조선 때 종이로 만든 출판물은 비쌌고, 목각본 인쇄물은 최소 50~100벌은 팔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김정호에게 재정적 후원은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정호의 신분은 평민이거나 평민 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원래 직업이 목각 기술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대인인 유재건(1783~1880)이 쓴 <이향견문록>의 글 ‘김고산정호’를 보면 “능숙하게 (지도를) 그려내고 능란하게 새긴 것을 인쇄해 세상에 내놨다”는 표현이 나온다.
장상훈 국립진주박물관장은 “목각으로 생업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목각을 하다가 지도 제작으로 가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목각 장인 출신이라면 기본적으로 평민 이하의 낮은 신분이다”라고 말했다.
그 밖에 우리가 김정호에 대해 아는 정보는 거의 없다. 태어난 때와 죽은 때, 고향, 거주지, 관향, 가족 등 대부분의 정보가 불확실하다.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양반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지도와 지리지 제작 분야에서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의 집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 가운데 하나인 서울 중구 중림동(옛 약현) 20번지 교통섬엔 그의 옛집 터 표지석이 쓸쓸히 서 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개리 레드야드 지음, 장상훈 옮김, <한국 고지도의 역사>, 소나무, 2011
이기봉, ‘19세기 한국에서 김정호의 대중적인 대축척 지도 제작’, 2016
이상태, <김정호 연구>, 경인문화사, 2021
이윤석, ‘상업 출판의 관점에서 본 19세기 고지도’, 2013
최선웅·민병준, <해설 대동여지도>, 진선출판사, 2017
*김규원의 역사 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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