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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성종은 성공하고 연산군은 실패한 이유?

관대하고 의사소통 많았던 성종, 비판 무시한 채 일방통행한 연산군
등록 2022-10-10 11:57 수정 2022-10-18 05:50
❶ 왼쪽 끝 솟을대문 건물이 사헌부, 오른쪽 건물 맨 위쪽이 의정부 건물이다. 공유사진

❶ 왼쪽 끝 솟을대문 건물이 사헌부, 오른쪽 건물 맨 위쪽이 의정부 건물이다. 공유사진


“왕이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도 말을 바꾸지 않는 것은 ‘신의’라는 말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 내가 그대를 옥에 가둔 것은 그대가 고집하기 때문이다. (…) 이제부터 말할 만한 일이 있거든 극진히 말하라. 내가 가상하게 받아들이겠다. 그대가 의기가 있고 굴하지 않는 것이 나는 대단히 기쁘다. 가서 그대의 직무를 계속하라’고 말하고, 승정원에 지시해 술을 먹이고 예의를 갖춰 보냈다.”

-<성종실록> 1477년 9월8일, 사헌부 지평 김언신이 형조판서 현석규를 탄핵하자 이에 대한 성종의 답변

“대간(사헌부와 사간원)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정승이 말하고, 정승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육조가 말한다. 아랫사람(신하)들이 그 뜻을 이루려고 애쓰니,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 요즘 위에서(왕이) 하는 일을 기어이 이기려고 감히 다툰다. 전에도 대간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일마다 다투지는 않았다. 매우 유감스럽고 분개한다. 대간이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데 대신이 따라서 말하니, 결코 들어줄 수 없다.”

-<연산군일기> 1503년 3월16일, 연산군의 인사에 대간과 의정부가 반대하자 이에 대한 연산군의 답변

대신을 존중하고 3사 의견을 경청한 성종

성종 이혈(1457~1494)의 시대는 조선이 완성된 시기였다. 조선의 헌법과 법률이라고 할 <경국대전>이 마무리됐고 정치적 불안정도 가라앉았다.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은 둘이었다. 하나는 할아버지인 세조 이유의 쿠데타(계유정난)로 인한 왕실과 대신들의 상처였다. 둘은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 이장(1438~1457)과 작은아버지 예종 이황(1450~1469)의 이른 죽음으로 인한 왕위 계승의 불안정이었다.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성종도 불과 12살에 왕이 됐다.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친 뒤에야 친정을 시작했다. 그 뒤 성종은 두 가지 불안정을 모두 해소했다. 먼저 사림파(건국 불참여파)를 등용하고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강화해 대신과 3사가 서로 견제하는 정치 구조를 만들었다. 동시에 ‘왕과 사대부의 공동정치’라는 조선의 정치 이념을 발전시켰다. 25년 동안 집권하면서 왕위 계승도 안정시켰다.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대거 등용되던 시절, 3사엔 비교적 젊은 사림파가 많았고 의정부 대신은 훈구파(세조 쿠데타 참여파)가 많았다. 이때 성종은 경험 많은 대신들을 존중하면서도 ‘젊은 근본주의자’인 3사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줬다. 왕과 대신, 3사라는 조선의 삼권분립이 자리잡은 시기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맨 앞에 인용된 1477년 사헌부 지평(정5품) 김언신의 형조판서(정2품) 현석규 탄핵(고발) 사건이었다.

김언신이 현석규를 탄핵한 이유는 그가 ‘소인’이어서 조정의 화합을 해친다는 거였다. 김언신은 그 근거로 현석규가 도승지 시절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동료들을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성종은 이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한 뒤 김언신의 탄핵이 지나치다고 결정하고 오히려 그를 잡아들여 조사하게 했다.

성종은 김언신을 직접 조사하면서 죽어도 현석규를 계속 소인이라고 주장할지, 아니면 잘못을 인정할지를 물었다. 김언신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종은 김언신을 풀어주고 술까지 먹여 사헌부로 돌려보냈다. 성종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 신하를 처벌한다면 아무도 제대로 간언하지 않을 것이다. 또 대간에서 강하게 간언해야 훈구파 대신들이 부정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❷ 1591년 <총마계회도>는 사헌부의 모습을 그렸다. 호림박물관 소장

❷ 1591년 <총마계회도>는 사헌부의 모습을 그렸다. 호림박물관 소장

‘사주’ 드러났는데도 사면 지시

이 사건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다. 다음해인 1478년 김언신이 임사홍의 사주를 받아 현석규를 탄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김언신은 곤장을 맞고 유배됐고, 임사홍도 유배됐다. 당시 성종은 “대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으나, 들으면 그 폐단이 이러하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김언신이 극진히 말할 때는 절개가 곧은 선비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그 붕당을 위해 말한 줄 알았겠는가”라고 개탄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관대한 왕이었다. 8년 뒤인 1486년 임사홍, 김언신 등의 직첩(임명장)을 돌려주라고 지시했다. 사면·복권을 지시한 것이다. 성종은 “하늘의 도리도 10년이면 변하는데, 임사홍도 스스로 새로워지는 마음이 없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간이 “열 군자를 쓰는 것이 한 소인을 물리치는 것만 못하다”며 거세게 반대했다. 심지어 대간은 성종에게 “작은아들로서 왕이 됐으니 종사와 백성을 위해 계책을 세워야 한다”며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죽음을 면치 못할 망발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은 “임사홍이 소인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문제점을 알고 있고, 대간에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된다”고 반박했다. 성종이 받아들이지 않자 대간과 대신들은 모두 사직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종은 임사홍, 김언신의 사면·복권을 관철하면서 대간과 대신들의 사직서도 모두 반려했다. 인내와 긍정의 화신이었다.

성종의 죽음 뒤 이런 정치적 유산은 고스란히 아들 연산군 이융(1476~1506)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정치와 사대부를 대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태도는 전연 달랐다. 아버지 성종은 왕과 사대부의 공동정치, 왕-대신-3사의 견제와 균형을 추구했지만, 아들 연산군은 절대왕권과 왕의 독재를 추구했다.

❸ 의정부 본관 정본당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❸ 의정부 본관 정본당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성종 이후 시작된 왕과 신하의 갈등

연산군과 3사의 갈등은 1494년 즉위 직후부터 벌어졌다. 죽은 성종에 대해 왕실의 전통대로 수륙재를 지내려 했는데, 3사에서 불교 의례라며 반대했다. 원로 대신 노사신(1427~1498)의 의견에 따라 그대로 시행했지만, 연산과 3사의 관계는 처음부터 틀어져버렸다. 그 뒤로 연산과 3사는 외척과 내관, 유모, 폐비 윤씨 등의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쳤다. 젊은 근본주의자들로 이뤄진 3사는 이 과정에서 노사신 등 대신들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결국 조선의 첫 사화(선비 탄압)가 터졌다. 1498년 무오사화는 국왕과 대신들이 손잡고 3사의 사림파를 숙청한 일이었다. 무오사화의 방아쇠는 김종직의 제자이자 당시 사림파의 리더인 김일손의 세조 관련 사초였다. 김일손은 사초에서 세조의 잘못을 여러 차례 노골적으로 언급했다. 조사 과정에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세조의 쿠데타에 대해 풍자적으로 쓴 ‘조의제문’(의제를 기리는 글)까지 발견됐다. 조사가 확대돼 모두 52명이 처벌됐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연산군 집권 초기, 대신을 대표해 3사와 대립했던 노사신이 사림파의 희생이 확대되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점이다. 노사신은 3사의 근본주의적 비판에도 반대했고, 사화의 지나친 처벌에도 반대했다. 그는 중용의 정치인이었다.

무오사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1504년 갑자사화는 3사뿐 아니라 대신까지 사대부를 초토화했다. 갑자사화는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이 준 술을 실수로 연산의 옷에 쏟은 일, 전 판서 홍귀달이 손녀의 입궐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일로 시작됐다. 그런데 불행히도 두 사람은 모두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됐다. 홍귀달은 폐비 때 승지(수석비서관), 이세좌는 사약 내릴 때 승지를 맡았다. 왕의 옷에 술을 쏟은 사건이 폐비 윤씨 사건의 진상 조사로 확대됐고, 조선 최대 사화로 번졌다.

사형과 사망만 100명이었고, 부관참시 22명, 유배 106명 등 유배형 이상이 239명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3사 관리가 92명이었고, 판서와 정승 등 대신이 20명이나 됐다. 조선 전기 중앙정부의 관원이 741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중앙 관리의 25.6%가 처벌받았다.

소통 없는 절대왕권주의자, 연산군

어떻게 이런 참사가 일어났을까? 가장 큰 원인은 연산에게 있었다. 연산은 신하들과 함께 정치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절대왕권주의자였다. 또 사림파로 구성된 3사의 비판을 받아들일 정치적 역량이나 의지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정치적 사안의 공사와 경중을 구분하지 못했다. 아버지 성종이 결정한 어머니 윤씨의 죽음을 이유로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인 대신과 3사의 관리들을 대거 살해했다.

둘째 원인은 사림파와 3사에 있었다. 이들의 태도엔 근본주의가 있었고, 심지어 왕과도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같은 사대부였지만 조선 건국이나 세조의 쿠데타에 참여한 훈구파 대신들을 혐오했다. 이런 강퍅한 태도는 성종 같은 관대한 군주에겐 통했지만 연산 같은 독재적 군주에겐 통할 수 없었다. 사림파의 근본주의는 사화를 자초했다.

조선 왕과 사대부의 공동정치는 성종 때 완성됐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성종의 아들 연산군 때에 이르자 그 체제가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관대한 성종이나 중용적인 노사신 외에 다른 왕이나 신하들은 그런 체제를 운영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 뒤로 조선의 정치체제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쳤다. 사화는 명종 때까지 거의 50년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사화가 끝나자 사림파의 당파 싸움이 시작됐고, 19세기 후반 당파 싸움이 끝나자 조선은 멸망했다. 조선의 사화와 당쟁의 무대는 언제나 서울이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범, <연산군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글항아리, 2010

방상근, ‘성종의 중재적 리더십과 태평의 정치’, 2011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혜화1117, 2020

*지금까지 ‘역사 속 공간’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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