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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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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왜 대선 후보들은 청와대를 떠나려 할까?

고려 행궁에서 조선 회맹단, 경무대, 일제 총독 관저까지 기구한 청와대 터의 역사
등록 2022-02-12 12:14 수정 2022-03-19 02:15
조선 때 청와대 터는 경복궁과 북악 사이 텅 비어 있는 곳이었다. 아래쪽 검은 숲이 경복궁, 그 위 빈터와 나무로 둘러싸인 산기슭이 현재의 청와대 터다. 정선의 <백악산 취미대>. 익명의 소장가 제공

조선 때 청와대 터는 경복궁과 북악 사이 텅 비어 있는 곳이었다. 아래쪽 검은 숲이 경복궁, 그 위 빈터와 나무로 둘러싸인 산기슭이 현재의 청와대 터다. 정선의 <백악산 취미대>. 익명의 소장가 제공

“중서문하성에서 보고하기를 ‘새로 남경(현재의 서울)을 만들려면 (…) 산수의 형세를 따라 동으로는 대봉(큰 봉)까지, 남으로는 사리(모랫말)까지, 서로는 기봉(갈림봉)까지, 북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고려사절요> 숙종 7년 1102년 3월

“권중화와 정도전, 심덕부, 김주, 남은,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도로의 터를 정하게 했다. 권중화 등은 고려 숙종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했다. 그 남쪽에 해방(북북서 방향)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남남동 방향)이 평탄하고 넓으며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했다.” -<태조실록> 1394년 9월9일

청와대 세종으로? 광화문으로?

제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주요 대선 후보들이 모두 청와대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당내 경선 때인 2021년 8월21일 세종시를 찾아가 “대통령 제2집무실과 국회 분원을 세종시에 설치해 행정수도를 완성하겠다. 청와대도 세종시로 옮기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2022년 1월27일 “대통령실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설치하고 관저는 삼청동 총리공관 등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존 청와대 부지는 역사관이나 시민공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2022년 1월25일 “집권하면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겠다. 진짜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 현재 청와대 집무실은 국빈 영접과 주요 정치 행사가 있는 날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아이디어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려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시로 청와대를 옮기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공약한 뒤 실제로 방법을 검토했다. 그러나 경호나 보안 등의 문제로 어느 대통령도 청와대를 이전하지 못했다.

과연 청와대 터는 어떤 곳이기에 대통령선거 때마다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는 걸까? 청와대 터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때인 11세기 후반이다. 고려 문종은 1067년 현재 서울이 포함된 양주에 ‘남경’을 설치했고, 다음해 남경에 새 행궁(왕의 지방 궁궐)을 지었다. 고려 숙종도 1099년 남경 건설을 추진했고, 1102년 남경의 경계를 확정했다. 남경의 경계는 북은 북악(면악), 서는 인왕산(기봉)으로 보이나, 남쪽의 사리와 동쪽의 대봉은 위치가 불확실하다. 다만 지형상 고려의 남경과 조선의 한양은 상당 부분 겹쳤을 것으로 보 인다.

바로 고려 문종과 숙종이 남경 행궁을 지어 운영한 곳이 현재의 청와대 터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조선이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경복궁을 지을 때 “고려 숙종 시대에 경영했던 (남경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 그 남쪽을 궁궐터로 정했다”고 <태조실록>에 적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복궁의 북쪽이 남경의 행궁 터였다. 청와대 터의 역사는 고려의 남경 행궁에서 시작됐다.

경복궁 신무문 앞에서 바라본 청와대와 북악산. 김진수 선임기자

경복궁 신무문 앞에서 바라본 청와대와 북악산. 김진수 선임기자

조선시대 회맹단과 경무대로 활용

조선이 건국된 뒤 경복궁 신무문 북쪽의 고려 행궁 터에 ‘회맹단’이 조성됐다. 회맹단이란 왕과 신하들이 모여 동물의 피를 함께 마시고 영원한 의리를 하늘에 맹세하는 ‘회맹제’가 열리는 제단이다. 회맹제는 조선 초기 태종 때 시작해 18세기 영조 때까지 꾸준히 열렸다. 특히 영조는 1728년 3월 이인좌의 반란을 진압한 뒤 7월 대규모 회맹제를 열었다.

간혹 회맹제가 열렸지만, 궁궐 건물도 없고 민가도 없던 회맹단 일대는 황량했다. 1702년 10월27일 <숙종실록>은 “회맹단 위에서 무사들이 활 쏘는 것을 한 대신이 막으려다가 무사들에게 맞을 뻔했다”는 사헌부의 보고를 적었다. 제단이 있고 주변이 비어서 활터로 쓰인 것이다. 18세기 정선의 그림 <취미대>(산 중턱), <은암동록>(숨은 바위 동쪽 기슭)에는 텅 빈 일대 풍경이 잘 나타난다. 회맹단은 현재의 청와대 본관 앞 정문 일대로 추정된다.

회맹단 부근에 살았던 김상헌은 청나라 선양에 잡혀 있을 때 지은 연작시 ‘근가십영’(집 근처 10곳을 읊다)에서 회맹단을 노래했다. “도성 북쪽 흰 모래땅이 깎은 듯 평평한데/ 네모난 제단은 옛날부터 편안했다/ (…)/ 일 지나고 사람 없으니 비어서 적막하다/ 달빛 희고 바람 맑으니 좋은 벗이 찾아오고/ 거닐고 거니니 즐거움이 끝이 없다/ 내 집은 소 울음 들릴 거리에 있으니/ 어느 날 돌아가서 지팡이 짚으며 걸을까?”

회맹단 일대는 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으로 완전히 새로워졌다. 그 전엔 회맹단과 건물 몇 채만 있었으나, 무려 488칸의 건물이 들어섰고 담장이 세워져 명확히 경복궁 후원이 됐다. 크게 보면 남서쪽(현재의 본관 진입로와 영빈관 일대)에 경농재 등 농업 장려 시설, 남동쪽(현재의 비서동과 녹지원 일대)에 융문당과 융무당 등 과거 시험장과 사열 시설, 북쪽(현재의 관저)에 옥련정 등 휴식 시설이 들어섰다.

조선시대 내내 회맹단으로 불린 청와대 터는 고종 때 ‘경무대’(무력을 밝히는 터)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경무대는 경복궁 후원 중 융문당·융무당 일대를 말하는데, 경복궁 후원 전체를 이르는 말로도 사용됐다. 경무대라는 이름은 융문당의 북문인 ‘경무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경복궁 후원의 융문당·융무당이 완공된 1869년 2월부터 1894년 2월까지 25년 동안 경무대를 자주 찾았다. <고종실록>에 218건, 고종 시기 <승정원일기>에 1095건이나 나올 정도였다. 과거 시험을 많이 치렀고, 군대를 사열하거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신)이 이어지면서 경무대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조선 시대 경복궁 북쪽은 회맹단이 있던 빈 터였다. 이 그림은 북악 기슭에서 경복궁과 남산을 내려다본 모습. 바로 앞 왼쪽의 네모난 제단이 회맹단, 그 위는 경복궁 북쪽 담장. 그 위 왼쪽의 높은 봉우리가 남산, 오른쪽 뾰족한 봉우리가 관악산.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은암동록’.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시대 경복궁 북쪽은 회맹단이 있던 빈 터였다. 이 그림은 북악 기슭에서 경복궁과 남산을 내려다본 모습. 바로 앞 왼쪽의 네모난 제단이 회맹단, 그 위는 경복궁 북쪽 담장. 그 위 왼쪽의 높은 봉우리가 남산, 오른쪽 뾰족한 봉우리가 관악산. 정선의 <경교명승첩> 중 ‘은암동록’. 간송미술관 소장.

“매우 권위주의적인 입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과 후원은 조선총독부 소유가 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6년 조선총독부 완공, 1929년 조선박람회를 거치면서 경복궁 건물의 90% 이상이 철거됐다. 1928년 경무대의 중심인 융문당·융무당 건물도 서울 용산구의 일본 절인 용광사에 팔려 나갔다. 해방 뒤 용광사는 원불교로 넘어갔고, 2007년 이 건물들은 재개발에 따라 전남 영광으로 옮겨졌다.

1926년 경복궁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데 이어 1939년에는 경무대에 조선 총독 관저가 들어섰다. 해방 뒤 총독 관저는 존 하지 미군 군정청 사령관의 관저가 됐고,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가 됐다. 그것이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민주화 이후인 1990~1991년 노태우 대통령은 새 관저와 집무실을 지었고, 옛 총독 관저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철거 됐다.

일제나 미군정, 이승만 대통령은 총독 관저를 계속 ‘경무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독재자의 그림자가 드리운 경무대라는 이름을 거부했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김영상이 ‘화령대’와 ‘청와대’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윤보선이 청와대로 결정했다. 청와대(파란 기와집)는 총독 관저의 기와가 푸른색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사실 총독 관저의 기와는 청색보다는 녹색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이름은 청와대로 바뀌었다.

역사·정치 전문가들은 대체로 청와대 터가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역사학)는 “청와대 터는 앞으로 경복궁, 뒤로 북악이 막고 있다.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시민들의 삶도 보기 어렵다. 매우 권위주의적인 입지”라고 평가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역사학)도 “청와대 터는 민주사회의 대통령이 일하기엔 적절치 않은 곳이다. 해방 뒤 정부 수립 때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의 위치에 대해 생각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내부 구조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책 <청와대 vs 백악관>의 저자인 박찬수 <한겨레> 대기자는 “청와대는 서울 안에서도 고립돼 있지만, 청와대 안에서도 대통령 본관 집무실이 비서동에서 300m가량 떨어져 있다.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이 보좌관의 사무실과 바로 붙어 있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보좌진과의 격의 없고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고 말했다.

문제는 청와대를 광화문 앞 등 서울의 다른 곳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건축가인 김진애 전 의원은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를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려고 진지하게 검토했지만, 경호나 보안상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현재로서는 대통령이 비서동 쪽으로 가서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박찬수 대기자는 “현재의 청와대엔 문제가 있고,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로 옮기는 것도 어렵다면 헌법을 개정해서 청와대와 국회를 모두 세종시로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세종시로 간다면 청와대 입지는 현재처럼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다른 기관과 수평적인 곳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간 괴리보다 권력 독점이 문제

청와대의 입지나 내부 구조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는 “공간의 위치나 접근성을 개선한다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청와대 문제의 본질은 대통령의 권력 독점이지 공간적 괴리가 아니다. 연립정부나 협치, 권력 분산 같은 근본적 변화 없이는 한국의 대통령제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대통령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 유산>, 2019
박찬수, <청와대 vs 백악관>, 개마고원, 2009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서울>, 혜화1117, 2020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김규원의 역사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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