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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콤플렉스 왕 광해군, 궁궐 건축에 미치다

불안한 왕위 지키려고 형제·조카 살해, 창경궁 재건, 인경궁·경덕궁 대규모 신축 공사 나서
등록 2021-11-20 07:59 수정 2022-01-13 15:05
청기와를 얹은 창덕궁 선정전은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 광정전을 그대로 옮겨 지은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청기와를 얹은 창덕궁 선정전은 광해군이 지은 인경궁 광정전을 그대로 옮겨 지은 것이다. 문화재청 제공

“왕(광해군)이 일찍이 지관(풍수가) 이의신에게 몰래 묻기를 ‘창덕궁은 큰일을 두 번 겪었으니 내가 머물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는 노산군(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의신이 대답하기를 ‘이는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고입니다. (…) 빨리 옮기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 이에 창경궁을 고치도록 재촉하곤 궁이 완성되자 또 머물지 않고, 마침내 두 개의 새 궁을 짓도록 했다. 완공한 뒤 거처하려고 했기 때문에 경덕궁(경희궁)을 먼저 짓고 인경궁은 완성되지 못했는데, 왕이 폐위됐다. 모두 이의신의 말대로였다.”(1613년 1월1일 <광해군일기>, 광해군 폐위 뒤 추가된 주석)

인경궁 터에서 발굴된 배수로

2016년 8월 건물을 신축하려던 서울 종로구 누하동 224번지의 지하 2m 지점에서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커다란 배수로 시설이 발굴됐다. 배수로는 너비 1.65m, 높이 0.9m, 발굴된 길이 4m인데 모두 긴 돌로 덮여 있었다. 이 발굴 사실은 3년 뒤인 2019년 10월 <한겨레>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유적을 발굴한 불교문화재연구소는 규모나 격식으로 볼 때 조선 광해군 이혼(1575~1641) 때 지은 궁궐인 ‘인경궁’의 시설로 추정했다. 배수로가 발굴된 누하동 일대는 인경궁 터로 추정돼온 곳이다. 인경궁은 사직 담장의 동쪽과 인왕동(수성동)에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현재의 누하동과 누상동, 필운동, 체부동, 내자동, 적선동, 통의동 등 서촌 남쪽 일대다.

인경궁은 1616년 사업을 시작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이 배수로는 인경궁의 시설 중 처음 발굴된 것이다. 당시 인경궁의 보조 궁궐로 지어진 경덕궁(현재 경희궁)은 조선 후기에 이궁(제2궁궐)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인경궁은 아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애초 광해군은 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는 선조의 왕비가 아닌 ‘후궁’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친형 임해군이 있었고, 아래로 배다른 남동생(왕자) 12명이 있었다. 선조는 광해군보다 3살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왜란 뒤 1606년엔 선조의 둘째 왕비인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선조의 아들 14명 가운데 유일한 적자(대군)였다.

그러나 운이 따랐다.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는 끝내 왕자를 낳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정 분리(분조)가 필요해지면서 급히 세자를 정해야 했다.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은 1606년 너무 늦게 태어났고, 광해군보다 31살이나 어렸다. 또 세자를 영창대군으로 바꾸려던 선조가 1608년 급하게 죽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바람 앞 등불과 같은 상태로 1608년 왕위에 올랐다. 불행히도 이런 극심한 불안감은 그를 나쁜 쪽으로 몰았다. 그는 잠재적 왕위 경쟁자들을 잇따라 제거했다. 1609년 친형 임해군, 1613년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 1614년 영창대군, 1615년 배다른 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죽였다. 1618년엔 아버지 선조의 둘째 왕비이자 명목상 자신의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폐위했다.

2016년 8월 서울 종로구 누하동 건물 공사장에서 인경궁 배수로로 추정되는 시설이 발굴됐다. 김규원 선임기자

2016년 8월 서울 종로구 누하동 건물 공사장에서 인경궁 배수로로 추정되는 시설이 발굴됐다. 김규원 선임기자

인왕산 자락에 새 궁궐 지으려 한 까닭

이런 반윤리적 행위는 광해군의 개혁 정치를 무색하게 했다. 경기도 대동법 시행, <용비어천가> 등 중요 출판물 재간행, 명-청 교체기의 중립 외교, 창덕궁·창경궁·경운궁 재건 같은 업적은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했다’는 명분론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형제와 조카를 잇따라 죽인 광해군은 풍수와 궁궐 건축에 몰두했다. 1608년 즉위한 뒤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법궁(제1궁궐) 창덕궁에 들지 않고, 월산대군 사저이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지냈다. 1615년 창덕궁에 들었으나, 이번엔 창경궁 재건을 지시했다. 그러나 1616년 창경궁 재건이 끝나자 다시 인경궁과 경덕궁 건설을 시작했다. 앞의 3개 궁궐 공사는 재건축이었으나, 뒤의 2개 궁궐은 신축이었다. 당연히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신하들은 반대했으나, 그대로 밀어붙였다.

애초 인왕산 남쪽 자락에 인경궁을 지으라고 지시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문동(새문안, 서대문 안쪽 동네)에 경덕궁도 지으라고 또 지시했다. 인경궁은 이궁, 경덕궁은 그보다 격이 낮은 ‘별궁’으로 성격을 부여했다. 그러나 실제 두 궁궐은 왜란 전 법궁 경복궁, 왜란 뒤 법궁 창덕궁·창경궁을 대신할 정도의 대규모였다. 법궁을 대규모로 짓는다면 반대가 심할 것이므로 인경궁과 경덕궁으로 나눠 추진했다. 두 궁은 창덕궁·창경궁처럼 거의 붙어 있었다.

광해군은 왜 이런 대규모 궁궐 건축에 나섰을까? 인경궁과 경덕궁 건설에 나선 배경엔 이른바 ‘왕기’설이 있었다. 훌륭한 왕을 낳을 기운이 있는 곳에 새 왕궁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인왕산 자락은 과거 태종 이방원의 잠저(사저)가 있던 곳으로 세종과 문종, 세조가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 인왕(어진 왕)이란 말도 상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새문동 역시 ‘왕기’가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좀더 들여다보면, 여기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둘러싼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인왕산 남쪽 사직동에 있던 아버지 선조의 사저(나중의 도정궁)가 ‘왕기’의 실체였다. 살아 있을 때 선조는 광해군을 아끼지 않았다.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아들인 선조도 평생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래서 장성한 서자 출신 세자 광해군을 핏덩어리인 영창대군으로 교체하려 했다.

광해군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오히려 더 아버지의 정통성을 이으려 했다. 인왕산 자락 사직동 도정궁에서 중종의 서자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된 선조의 입지전, 그것을 자신의 인경궁에 품으려 했다. 그래서 인경궁은 광해군이 쫓겨난 뒤 살아남지 못했다. 인조가 된 능양군에게 도정궁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던 백운동천 금천교는 인경궁의 금천교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던 백운동천 금천교는 인경궁의 금천교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중종과 선조 사저까지 계승하려 했지만

광해군이 둘째로 선택한 공간은 새문동이었다. 애초 광해군이 새문동에 ‘왕기’가 있다고 본 이유도 선조의 또 다른 사저 때문이었다. 선조는 즉위 전 하성군 시절에 중종의 맏아들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가 새문동의 중종 사저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왕이 되자 그 집을 넷째 아들 신성군에게 넘겼다. 신성군이 죽자 다시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의 넷째 아들 능창군에게 넘겼다.

광해군은 중종-복성군-선조(하성군)-신성군-능창군으로 이어진 그 사저의 계승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배다른 동생들인 신성군과 정원군은 선조의 사랑을 받은 경쟁자였다. 광해군은 그것을 중종-복성군-선조-광해군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1615년 배다른 조카인 능창군을 역모 혐의로 죽이고, 1617년 새문동 능창군의 집을 몰수해 그 자리에 자신의 경덕궁을 지었다. 왕위뿐 아니라, 중종과 선조의 사저까지 계승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창군의 형인 능양군이 서인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았기 때문이다. 인조는 이 집의 계승을 중종-복성군-선조(하성군)-정원군(원종)-인조(능양군)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이 사저의 주인은 원래 정원군이었는데 광해군이 이를 두려워해 경덕궁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광해군일기>에 추가했다. 새문동 ‘왕기’설의 주인공은 선조-광해군에서 정원군-인조로 바뀌었다. 인조반정을 정당화한 것이다.

사실 정원군의 집은 당시 송현동(현 한국은행 자리)에 있었고, 새문동 집은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소유였다.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만들려고 역사를 조작한 것이다. 광해군과 인조의 새문동 중종 사저 다툼 속에서 진짜 집주인들인 신성군, 능창군은 지워졌다.

광해군이 쫓겨난 뒤 인경궁은 버려졌다. 인조 이후 왕들은 인경궁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인경궁의 건물 대부분이 뜯겨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보수 공사에 사용됐다. 그 가운데 인경궁 광정전은 그대로 창덕궁 선정전이 돼서 살아남았다. 고급 청기와를 쓴 것이 당시 화려했던 인경궁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또 백운동천 금천교는 인경궁 건설 전부터 있었는데, 인경궁의 금천교로 사용됐다.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다가 백운동천 복개 과정에서 사라졌다.

인경궁 터엔 왕의 아들딸들의 집이 들어섰다. 내자동 청평위궁은 현재의 서울경찰청 자리에 있었고, 통의동 인평위궁은 영조의 사저 창의궁으로 이어졌다. 창의궁 남쪽에 있던 적선동 월성위궁 역시 인경궁 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왜란 뒤 지어진 유명 소설 <운영전>에 나오는 수성궁은 인경궁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배수로가 발굴된 누하동과 누상동의 옛 이름은 ‘누각동’인데, 이 역시 인경궁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화문은 유일하게 남은 경덕궁(현 경희궁)의 옛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흥화문은 유일하게 남은 경덕궁(현 경희궁)의 옛 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뜯기고 망가진 경덕궁

경덕궁은 조선 후기에 이궁으로 법궁인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널리 사용됐다.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궐이나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로도 불렸다. 그러나 1865년 경복궁 중건에 사용되기 위해 건물 상당수가 뜯겼다. 1910년 경희궁엔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교(현 서울고)와 일본인 주택이 들어섰다. 2002년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또 한 번 훼손됐다. 현재 경희궁 터에 남은 옛 건물은 정문인 흥화문뿐인데, 그마저 제 위치가 아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불교문화재연구소, ‘서울 누하동 224번지 유적’, 2017
윤정, ‘광해군대 인경궁 건립과 ‘인왕산 왕기’설-선조 즉위와 사적과의 상관성’, 2021
윤정, ‘인조대 ‘새문동 왕기’설 생성의 정치사적 의미-경덕궁의 역사적 연원에 대한 고찰’, 2012
정정남, ‘효종대 인경궁 내 궁가의 건립과 그 이후 궁역의 변화’,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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