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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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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이순신은 왜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나?

정유재란 선봉 가토의 ‘부산 상륙’ 첩보를 덫으로 의심
선조의 변덕과 원균의 참패 뒤 명량해전 ‘13척 대승’
등록 2022-09-14 15:01 수정 2022-09-24 02:13
대한극장에서 찍은 이순신의 고향 건천동(현재의 인현동) 사진. 류우종 선임기자.

대한극장에서 찍은 이순신의 고향 건천동(현재의 인현동) 사진. 류우종 선임기자.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이순신)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끝까지 고문하여 그 내막을 밝혀낸 뒤 어떻게 처리할지 대신들에게 물어보라.” -1597년 3월13일 <실록>에서 선조의 발언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하고 그대에게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한 것은 나의 모책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됐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1597년 7월23일 선조가 이순신에게 내린 교서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맞서 싸운다면 해볼 만합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9월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1592년 4월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두 달 만인 6월15일 평양을 점령했다. 선조 이연(1552~1608)은 명나라와의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려 했다. 이 전세를 뒤집은 것이 이순신(1545~1598)의 해전 승리와 각지 의병들의 싸움, 그리고 명군의 참전이었다. 1593년 들어 조-명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했고, 왜군은 부산 쪽으로 후퇴했다. 전쟁은 대치전으로 전환됐다. 이때부터 1596년 말까지 조선과 명, 일본은 종전 협상을 벌였으나, 결렬됐다.

1901년 한성부 한글 지도를 보면 필동천과 생민동천 사이에 건천동이 있다.

1901년 한성부 한글 지도를 보면 필동천과 생민동천 사이에 건천동이 있다.

협상파 왜장 고니시가 보낸 밀사

결국 1597년 1월 왜군은 전면전을 재개했다(정유재란). 바로 이 정유재란의 개시를 앞두고 이순신과 선조가 정면충돌했다. 정유재란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부산 상륙을 바다에서 막을지 말지 문제였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1592년부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와 함께 일본군의 주력부대였다.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 가운데 대표적 강경파였다. 가토 부대가 가장 먼저 부산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조선에 알려준 사람은 가토의 경쟁자이자 협상파인 고니시였다.

이순신의 친구 류성룡(1542~1607)이 지은 <징비록>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고니시의 부하인 요시라가 몰래 김응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경상도 서부 육군 사령관)를 찾아왔다. 요시라는 ‘이번에 종전 협정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가토 때문이다. 며칠 뒤 가토가 (쓰시마에서 부산으로) 바다를 건너올 예정이다. 해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선다면 반드시 이를 격퇴할 수 있다. 놓치지 말라’고 말했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바로 조정에 보고했다. 1597년 1월2일 <선조실록>엔 “1일 경상 우병사 김응서의 ‘비밀 장계’에 대해 왕이 대신들을 불러 ‘편전 밖에서’ 회의하도록 했다”고 적혀 있다. 이날 선조는 이 일에 대해 보안을 지시했다. “이번 일은 매우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 사관은 우선 책에 쓰지 말 것이며, 비변사도 가져다 보지 말라.”

충남 아산 현충사 안의 이순신 옛집은 부인 상주 방씨의 집(처가)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충남 아산 현충사 안의 이순신 옛집은 부인 상주 방씨의 집(처가)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왜군 상륙 뒤 ‘이순신 처벌론’ 들끓어

이날 비변사(국가안보실)는 이 작전을 실행하되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신들도 속을까 의심했습니다. 다만 고니시가 평소 가토와 불화해서 그 말을 믿을 만하므로 기회를 잃어선 안 됩니다. 수군 장수들은 전후로 나눠 지키며, 야간 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요시라의 말만 듣고 진짜 형세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민 끝에 선조는 첩보를 받은 당일 가토 부대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 “이 일은 멀리서 지휘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원익 도체찰사가 서둘러 편의에 따라 시행하라. 일이 성공하면 마땅히 김응서와 이순신의 최고 공적으로 삼을 것이다. 이런 뜻을 각별히 두 사람에게 전하라.”

이 지시는 늦어도 1월10일 이전에 이순신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이 이 지시를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다. 1596년 10월12일부터 1597년 3월까지 <난중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는 1597년 1월 이순신의 보고가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이순신이 보고했다.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나아가 주둔해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벌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다시 알려주십시오.’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이 보고는 1월이라고만 돼 있어 선조의 공격 지시 이전인지 이후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내용에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듣는 자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는 표현을 보면, 가토가 건너오기 전의 보고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순신이 바닷길을 막지 않아 가토가 무사히 조선에 상륙한 뒤엔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불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경남 통영시 한산섬 수루를 바다에서 본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경남 통영시 한산섬 수루를 바다에서 본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다대포에 200척” “서생포에 280척”

가토가 바다를 건너기 직전인 1월11일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에게 찾아와 고니시의 말을 전했다. “가토가 7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일 쓰시마에 도착했는데, 순풍이 불면 곧 바다를 건넌다. 지난번에 약속한 일은 갖추었는가? 가토가 (한산도와 가까운) 거제도로 가면 공격하기 쉽겠지만, (한산도와 먼) 서생포나 기장으로 가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가토에게 ‘조선이 너를 원수로 여겨 전함과 육군을 준비 중이니 경솔히 건너오지 말라’고 하겠다.”(<실록> 1597년 1월19일)

그러나 이순신은 출동하지 않았고, 가토 부대는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1월21일 <실록>을 보면, 도체찰사 이원익이 이렇게 보고했다. “기장 현감 이정견의 급보에 따르면, 가토가 13일 다대포에 도착해 정박했다. 배가 200여 척이다.” 1월22일 <실록>엔 경상도 위무사 황신의 보고도 실려 있다. “가토 휘하의 큰 배 150척과 작은 배 130척이 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서생포로 향했다. 고니시가 ‘조선의 일은 늘 이렇다. 이런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고 말했다.”

고니시의 정보는 정확한 것이었을까? 가토가 4일 쓰시마에 도착했다는 정보는 중대한 것이었다. 가토 부대의 부산 상륙은 정유재란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바다를 건너오는 왜군을 막았다면 정유재란은 일어날 수 없었다. 또 가토 부대가 부산 서쪽의 거제도나 동쪽의 서생포, 기장으로 갈 것이라는 고니시의 예상도 사실에 근접했다. 가토 부대는 부산 서쪽의 가덕도, 다대포, 동쪽의 서생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고니시의 첩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을 부산 앞바다로 끌어내 역습하려는 유인 전술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서 가토 부대를 공격했다면, 이 모든 상황을 아는 고니시 부대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또 부산과 부산 앞바다는 왜 육군과 수군의 본부였고, 이순신 부대는 본부인 한산도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는 점도 위태로웠다.

경남 통영시 한산섬 수루 내부의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경남 통영시 한산섬 수루 내부의 모습. 김규원 선임기자.

혹독한 고문과 백의종군 뒤 다시 통제사

이와 관련해 1594년 9월3일 비슷한 상황에 대한 이순신 일기가 참고된다. “새벽에 비밀 왕명이 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수가 적을 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년 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다. 다만 험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 때문에 가볍게 나아가지 않을 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는가.” 이순신에게 선조의 지시는 병법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었다.

당대의 기록은 아니지만, 윤휴(1617~1680)가 쓴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엔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보고했다고 적었다.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가다보면 도중에 반드시 적진을 경유해 우리의 형세가 파악됩니다. 또 부산에서는 바람을 안고 적과 싸워야 해서 불리합니다. 어찌 적의 말을 믿고 전쟁을 시험 삼아 해볼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순신은 2월26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돼 3월4일 한양의 감옥에 갇혔다. 3월12일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3월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우의정 정탁이 간절한 구명 상소를 올렸다. “장수는 국가의 안위와 관계되므로 함부로 큰 벌을 줘서는 안 된다. 아끼고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은 4월1일 석방됐고, 권율 도원수를 따라 백의종군했다.

7월15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대패했다. 왜군은 남해를 장악하고 호남과 충청으로 쳐올라갔다. 선조는 칠천량 참패의 소식을 들은 당일인 7월22일 바로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했다. 넉 달 전 이순신을 죽이려 한 일에 대한 사과의 글도 함께 보냈다. 9월18일 이순신은 명량에서 13척으로 13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해 다시 왜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 왜군의 북상은 충청도 직산에서 멈췄다. 조-명 연합군이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서울 태생으로 남해 곳곳에 자취

이순신의 고향은 충남 아산군 염치읍 백암리, 현재의 현충사 일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어머니 초계 변씨의 고향이다. 10대 때부터 과거에 합격한 31살까지 여기서 살았다. 또 현재 현충사 안에 남아 있는 이순신의 옛집은 외가가 아니라, 아내 상주 방씨의 집(처가)으로 알려져 있다. 살림이 넉넉지 않아 이순신과 이버지 이정 모두 처가살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쪽 고향은 서울이다. 노승석 여해연구소장은 “증조부인 이변이 개성 부근에서 한양으로 이주했고, 조부 이백록이 한성부 남부 낙선방 건천동(마른냇골)에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이순신이 서울의 건천동에서 태어난 것은 그의 운명에 큰 영향을 줬다. 건천동은 당파 가운데 동인의 중심지이고, 류성룡이 이 동네에 함께 살았다. 1591년 정읍 현감(종6품)이던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파격 발탁된 것은 류성룡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다.

건천동은 현재의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다. 조선 때 지도를 보면, 건천동은 현재의 세운상가(마른내로6길 추정)를 따라 흐르던 생민동천(건천)과 마른내로4길, 을지로18길을 따라 흐르던 필동천 사이에 있었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집도 이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남해는 ‘이순신의 바다’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 자취가 깊게 배어 있다. 가장 중요한 두 곳은 전남 여수에 있던 전라 좌수영(1591년 2월~1593년 7월)과 경남 통영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1593년 7월~1597년 7월)이었다. 현재 여수 좌수영 자리엔 진남관이 있고, 한산도 통제영 자리엔 제승당과 그 유명한 수루가 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여해, 2014
<징비록>, 류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서해문집, 2003
<충무공 이순신 전서 1~4>, 박기봉 편역, 비봉출판사, 2006
<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창해, 2004

*김규원의 역사 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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