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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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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향해 슛을 날려라

등록 2002-05-03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color="#3399ff">축구읽기 10 ㅣ 세계 시민</font>

<font size="3" color="#a00000">88올림픽과 2002월드컵의 현재적 의미… 탈중심적 세계 이해의 기회로 삼아야</font>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을 때, 어떤 한국인들은 평화와 화합의 제전이라는 그 행사에 자발적으로 등을 돌렸다. 군사정권이 피묻은 손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유치하여 벌이는 잔치였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로는 소수였지만 적잖은 사람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올림픽을 대했다. 그러나 그랬을 뿐, 무슨 행동으로 경기를 방해한다거나 바깥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우리 실정을 알리는 무대로 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비판세력마저 국가주의적 선전에 얼마쯤 포박된 탓이었는지 모른다. 이전보다 조금 누그러진 88년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단호한 거부의 몸짓에 김을 빼버린 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래서 올림픽의 나날들은 순탄하게, 군사독재의 반대자들한테는 곤혹스럽게 흘러갔다.

세계인의 시각을 갖게 된 88올림픽

곤혹스러운 반대자들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양심과 스포츠의 매혹 사이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계율은 올림픽 중계방송을 아예 외면하지는 않되 가장 관심 있는 축구중계는 일부러 안 본다는, 좀 괴상하고 자학적인 것이었다. 그 바람에 호마리우를 득점왕으로 탄생시킨 88올림픽의 축구경기들이 내게는 영원히 채울 길 없는 부재의 기억으로 남았다.

88올림픽이 세계 속으로 도약할 자신감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었다는 식의 상투어는 멀리해야 옳다. 하지만 주최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88올림픽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공헌을 했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개연성이 높은 첫번째 추정은 광주에서 저지른 것과 같은 적나라한 폭력의 유혹에 군사정권이 빠져들 때마다 발목을 잡는 족쇄 구실을 맡아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보통 한국인들에게 88올림픽이란 구체적인 실감 속에서 ‘세계’와 만나는 첫 경험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해봄직하다. 말하자면 ‘우방’과 ‘적성국’이라는 한국전쟁 이래의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함께 놓을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눈앞에 불러다놓음으로써, 한국인들로 하여금 세계를 비로소 동시대인의 눈으로 대할 시점을 제공한 공로가 88올림픽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물증을 얻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는 적어도 88올림픽과는 비할 수 없이 떳떳한 조건에서 치르는 이번 월드컵에 무엇을 바라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이나 국가 위신의 앙양 이전에,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겨냥할 무형의 가치가 있다면 바깥 세계를 향한 이해의 증진이고, 이를 통한 자기 이해의 심화라고 나는 믿는다. 요즘 미국의 맹랑한 자기 중심주의,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터무니없는 몰이해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기운이 우리 안에서도 드높다. 그러나 정작 미국 중심의 세계 이해를 한국인들만큼 철저하게 내면에 새긴 사례가 또 있을지를 반성하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미국도 변방의 참가국 중 하나일 뿐인 월드컵 무대는 미국을 기준삼아 나머지 나라들을 섣불리 판단하고 서열화하는 그릇된 세계 이해 방식을 교정할 기회를 주는 드문 공간의 하나다. 더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한 나라들이 지닌 저마다의 상처와 고민에 그들의 눈높이에서 접근하는 가운데 새롭고 탈중심적인 세계 이해를 준비하는, 작지만 소중한 계기로 축구와 월드컵을 활용할 필요도 있다.

평화를 위한 상상력의 훈련장으로

얼마 전에 나온 김별아의 소설 은 이 점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축구시합을 빌미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벌인 희대의 전쟁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듯한 이 소설은 사건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깊숙이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고단한 역사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느라 숨가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축구를 소재로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려 한 작가의 선의는 훼손되지 않는다. ‘축구를 통한 세계 평화’ 같은 거창한 말을 입에 담기는 쉽다. 그러나 이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닐 수 있는 것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남들의 존재를 대등하게 인식하고,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상상력을 동반할 때뿐이다. 월드컵은 바로 그런 상상력의 훈련장이어야 한다.

손경목/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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