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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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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들의 패배, 이변이 아니다

등록 2002-06-21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size="3" color="#a00000">'세계축구 무역시장' 활성화 속 경기력 평준화로 '쉬어가는 경기'는 없다</font>

승리는 우연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환희는 기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위풍당당했고, 경기과정을 지배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6월4일 폴란드와의 첫 경기 이후 우리는 모든 경기에서 득점포를 터뜨렸으나, 거꾸로 실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선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정확한 시기에 넣고 뺐다. 상대를 허리에서부터 강하게 압박했고, 내내 경기를 주도했다. 그러고도 경기가 끝나면 힘이 남았다.

“관객이 보는 건 피곤한 스타들일 뿐”

‘테랑가의 사자’ 세네갈은 어떤가. 개막 팡파르가 울리기 전만 해도 프랑스와 덴마크의 1승 먹잇감으로 분류되던 월드컵 첫 출전국가. 개막전에서 우승후보 0순위 프랑스를 사냥했을 때만 해도 겨우 ‘개막전 징크스의 수혜자’일 뿐이던 세네갈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상대수비를 유린하며 골문으로 돌진하는 발군의 속도, 조직적인 수비와 확실한 공격력을 과시하며 어느새 16강을 넘어 8강까지 올라갔다.

월드컵의 판도가 갈수록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두운 시계 속에서 이른바 ‘축구강호’들의 부진과 ‘축구주변국’의 선전만이 엇갈리는 흐름으로 뚜렷이 감지될 뿐이다. 프랑스,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세상은 그들의 개별적 패배를 ‘이변’이라고 하였고, 그들의 잇단 패배를 ‘이변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한국, 일본, 세네갈…. 우리의 승리보다 그들의 패배가 더 주목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세상의 인심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가 기적이 아니라면 그들의 패배 또한 이변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들의 패배는 월드컵 대회 기간 내내 예외적으로 한두번 나올까 말까 하는 낙숫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한번씩만 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잇따라 패했고, 16강에도 오르지 못했다. 일상화한 이변은 더는 이변이 아니다. 그들이 지배하지 못한 건 운명이 아니라 경기 자체였고, 결과는 동반몰락이라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공은 둥글다’라는 축구경기의 금언은 누구도 쉽게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하지만 이 금언을 축구경기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건 짧은 생각이다. 공은 둥글기에 모든 물리적 작용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허명’은 사람의 운동에는 영향을 끼칠지언정, 축구공의 운동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공은 둥글다’라는 뜻은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팀이 이기는 게 축구’라는 너무도 자명한 이치를 말해주는 게 아닐까.

축구강호들의 몰락에는 어떤 복잡한 함수가 숨어 있을까. 독일의 축구영웅 프란츠 베켄바워는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예선탈락 이유를 지나치게 많은 프로경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십억명의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월드컵을 지켜보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피곤한 스타들일 뿐”이라고 탄식했다. 2006독일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인 그는 “독일월드컵은 선수들에게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개막일을 6월9일로 늦췄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신력은 주요한 변수였나

2002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의 장마철을 피하기 위해 대회기간을 예전보다 앞당긴 게 사실이다.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개막 직전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은 “1회전에서 탈락한 강호들의 공통점 가운데는 유럽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다는 점도 들어 있다”며 “유럽리그에서 격전을 치른 뒤 컨디션을 회복하고 팀워크를 다질 시간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1회전을 통과해 16강 이상 오른 다른 축구강국들의 경기결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유럽과 남미의 축구강국들은 너나없이 유럽리그 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스페인·이탈리아·브라질 선수들을 빼면 유럽리그는 선수 기근에 시달릴 것이다. 유럽·남미 지역의 중위권 국가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월드컵 출전국가 가운데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최하위권을 맴도는 세네갈 선수들마저 거의 대부분 유럽리그에서 뛰고 있다.

전문가들은 강호들의 몰락 원인을 정신력 부족에서 찾기도 한다. 프랑스가 세네갈에게 패하자 언론들은 “하위팀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다가 큰코다쳤다”고 떠들어댔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16강 진출에 사활이 걸린 한국전을 앞두고 쇼핑을 다녔다. 지단은 셋째아들 출산을 지켜보느라 대표팀에 뒤늦게 합류했다. 허정무 한국방송 해설위원은 “축구에서 정신력은 경기 자체를 바꿔놓는 핵심변수”라며 “스타플레이어들은 체력은 물론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브라질과 스페인 같은 팀들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의 저자인 장원재 숭실대 교수(문예창작)는 “브라질과 스페인은 정신 자세에서 프랑스나 아르헨티나와 분명 달랐다”고 잘라 말했다. 프랑스는 예선을 치를 필요가 없었고 아르헨티나는 지역예선에서 승승장구해 상대적으로 선수들의 정신자세가 느슨했지만, 스페인은 지난 대회에서 안일하게 덤비다 예선탈락한 경험이 있고, 브라질은 지역예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해 각오가 남달랐다는 얘기다.

그러나 의 저자인 강석진 한국고등과학원 교수(수학)는 “아무리 비싼 몸값의 선수라고 해도 월드컵에서 뛰는 목표는 돈이 아니라 승리”라며 “지단이나 피구도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고 평가했다. 강 교수는 “브라질이 지금 순항하고 있지만 다른 강호보다 대진운이 좋았을 뿐 예전 월드컵에 비해 경기를 압도하지는 못하는 느낌”이라며 “유럽리그가 늦게 끝난데다 강팀과 약팀의 실력차가 줄어든 게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축구선수의 국적개념이 약해진다

역시 공은 둥글고, 둥근 공을 잘 차는 데는 실력이 으뜸변수다. 는 최근 사설에서 “축구계에도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경기력의 평준화와 경기 스타일의 동질화가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국가 간에 경계가 무너지면서 축구 주변국들은 축구 선진국들로부터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기술을 전수받음으로써 선수의 평준화가 이뤄지고 있다”며 “이런 추세 때문에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무너지고, 세네갈이나 한국 같은 나라가 급부상하는 새로운 축구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원재 교수는 이를 ‘세계축구 무역시장’의 활성화로 표현했다. “축구선수의 국적개념이 약해지고 있다. 세네갈팀은 두명만 빼곤 모두 프랑스리그 소속이다. 이번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앙골라 선수들은 전원이 포르투갈 이민 2∼3세로 구성되었다.” 장 교수는 “이런 활발한 교류가 축구의 수준차와 실력차를 미세하게 만들었다”며 “이제 월드컵에서 강팀들이 쉬어갈 수 있는 경기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를 모르고 8강에 맞춰 팀의 컨디션 조절 프로그램을 짠 것이 축구강호들의 큰 실수였다는 얘기다.

월드컵은 항상 현대축구의 흐름을 새롭게 제시해왔다. 허정무 해설위원은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느 때보다 상대를 강하게 밀어붙이는 압박 전술이 두드러진다”며 “상대의 압박을 이겨내고 맞받아 압박하면서 중앙보다는 좌우공간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팀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적어도 이런 현대축구의 흐름에 합류했고,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자신감이 결합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게 허 위원의 평가다.

요동치는 세계축구의 흐름 속에서 한국축구는 2006년 독일월드컵을 향해 어떻게 방향을 잡아나갈지, 그래서 우리를 어떤 흥분과 환희로 몰아넣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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