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를 외친 파키스탄 축구팬… “한국과 터키 누굴 더 응원할까” 행복한 고민
모든 아시아 시민들처럼 파키스탄 시민들도 한국이 월드컵 준결승에 오르자 마치 내 일처럼 기뻐했다. 아시아 축구는 결코 오를 수 없다고만 여기던 그 고지에 우뚝 선 한국팀을 자랑하며 파키스탄 시민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한마디로 한국의 한 경기 한 경기는 파키스탄의 축구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폴란드를 꺾을 때만 해도 ‘그런가’ 싶었던 한국이 다시 챔피언 후보로 꼽힌 포르투갈을 물리치자 예사로운 게 아니다 싶으면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수비수들이 세계적인 스타 피구를 묶어버리는 순간, 포르투갈의 16강전 진출은 어둠에 휩싸였고 동시에 파키스탄 축구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유럽 중심’의 숨겨진 울분을 풀어
한국 열풍은 다시 이탈리아전으로 이어져 파키스탄 축구팬들을 텔레비전 앞에 몰려들게 했다. 파키스탄 텔레비전은 생방송으로 열기를 전했고,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리며 이탈리아팀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파키스탄의 축구팬들은 ‘붉은악마’를 외치며 곳곳에서 잔치판을 벌였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다니….” 파키스탄 시민들에게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고, 이건 감격 이상의 어떤 충격 같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국에 대한 기대는 스페인과의 준준결승전의 폭발적인 시청률로 거듭 확인되었다. 모든 파키스탄 시민들은 한국을 응원하며 승리를 기도했고, 연장전과 승부차기로 이어지는 동안 한국팀의 스피드와 놀랄 만한 체력 앞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광주구장을 가득 메운 ‘붉은악마’의 응원이 일대 장관을 이루자 파키스탄 시민들은 감탄했다.
이 경기를 지켜본 파키스탄 시민들의 감동은 결코 한국 시민들의 것보다 작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말하자면 유럽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와 유럽문화 중심주의에 주눅들어 살아온 파키스탄 시민들은 한국의 승리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고, 숨겨진 울분 같은 것을 풀 수 있었던 때문이다.
파키스탄 시민들은 4700만명의 한국인들이 어떻게 에너지를 모아가며 월드컵에서 승리하는지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파키스탄팀이 세계적인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사실에 한탄하기도 했다.
파키스탄 축구팀은 현재 축구를 하는 182개 국가 가운데 하나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월드컵 예선 같은 것에서 일찌감치 탈락해버리는 매우 ‘허무한’ 수준이다. 파키스탄의 한심한 축구는 시민들 사이에서 늘 고통스런 대화의 단골거리로 등장하곤 했다. 이러다 보니 신문사마다 “왜 파키스탄은 축구를 잘할 수 없는가?”라는 시민들의 격노한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때가 왔다. 정부가 모든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고 혁신하는 것만이 파키스탄 축구를 살리는 길이다. 축구행정을 전문가들에게 넘겨주고 선수권대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 퇴역 해군장교 아즈팔 아칸은 일간신문 에 기고한 글에서 공무원과 축구 관련자들이 깊은 잠에 빠졌거나 직무태만 상태라고 비난하며 가장 믿을 수 없는 집단이라고 혹평했다. 물론 정부든 축구 관련자든, 누구든 파키스탄에서 그이의 글에 대꾸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개발도상국에 자신감을 선물하다
파키스탄 시민들에게 월드컵이 그야말로 큰 위안거리다 보니 신문과 방송은 특별지면과 생중계로 재깍재깍 경기를 보급하고 있다. 시민들은 중계를 보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직장과 학교까지 빼먹는 실정이었다. 자기 나라 팀이 출전하지도 않는 경기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열중했다. 이런 파키스탄의 월드컵 열광은 전통적으로 반유럽 친남미라는 응원구조로 드러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팀이 늘 최고로 각광받아왔다. 물론 아시아나 아프리카팀을 응원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늘 1회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탓에 성원을 보내고 말고 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달랐다. 우선 응원 대상이 전에 없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아시아에서만도 한국·일본·중국·사우디아라비아 네팀이 본선에 올랐으니.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1회전에서 비참하게 탈락했지만, 여전히 16강에 오른 한국과 일본이 있었기에 파키스탄 시민들의 볼거리는 그야말로 풍성했던 셈이다.
그리고 4강전에 돌입한 지금 시민들 사이엔 즐거운 고민이 생겼다. 같은 제3세계 개발국인데다 무슬림국가인 터키를 응원할 것인지 아니면 아시아의 상징 한국을 응원할 것인지를 놓고. 만약 터키와 한국이 결승전에 진출하면 과연 누구를 응원해야 할 것인가?
“터키도 아시아다.” “터키는 유럽을 동경해온 반쪽 아시아다.” “한국이 순종 아시아다.” 대개 시민들의 논쟁이 이렇게 갈리는 가운데 아시아 순도 면에서 좀 떨어지는 터키보다는 한국 쪽이 앞서는 모양세다.
물론 한국이 독일을 깨고 터키가 브라질을 넘었을 때를 가정한 고민이지만, 유럽과 남미 중심의 월드컵에 지친 시민들은 한국-터키 결승전이라는 꿈같은 기대감에 젖어 있다. 한국과 터키가 보여준 황홀한 경기가 계속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적어도 파키스탄 시민들에게는 좋든 싫든 이제 한국이 아시아 대륙의 운명을 걸머진 셈이다. 한국의 한판 한판에 따라 아시아 시민들이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것이며, 얼마나 큰 자부심을 느낄 것이며, 또 얼마나 아시아 축구 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인가? 이 모두는 이제 한국에 달렸다.
아직 기대감이긴 하지만 파키스탄의 축구팬들은 저마다 전문가 뺨치는 분석들을 내린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 주변의 사진현상소 주인 압바스 같은 이들은 의미심장하게 이번 월드컵을 진단했다. “훌륭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축구팀의 출현으로 이제 유럽이 지배하던 축구의 시대는 끝나간다. 앞으로 월드컵은 말 그대로 모든 대륙의 대표들이 각축하는 ‘월드컵’이 될 것이다.” 그이의 말마따나 실제로 과거 유럽이 독점하던 축구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우루과이를 비롯한 남미가 가세하면서 월드컵의 판도를 양분했듯이, 이번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눈에 띄게 약진한 만큼 추후 국제 축구판이 다변화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국과 터키가 전통적인 챔피언인 독일과 브라질에 도전장을 던진 사실은 축구의 개발도상국들이 어떻게 발전해나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이건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 사이에 단순히 축구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분야를 포함해 광범위한 개발에도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축구를 통해 얻은 “할 수 있다”는 개발도상국가들의 자부심은 분명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불순한 정치세력들의 ‘월드컵 챙기기’
그럼에도 현재 파키스탄의 환경에서 보면 여전히 월드컵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들을 무시할 수 없다. 월드컵을 즐기는 시민들이 문제가 아니라, 불순한 정치세력들의 월드컵을 통한 ‘챙기기’가 문제라는 뜻에서다. 특히 군사정부의 대통령 페르베즈 무사랴프처럼 이번 월드컵이 고마운 경우가 또 있을까? 적어도 월드컵 기간만큼은 정치나 경제적 불만으로부터 시민들의 시선을 돌려놓을 수 있고, 따라서 시민들의 압박으로부터 정부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샤라프가 국내외적으로 더 많은 스포츠 행사가 벌어지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까?” 요즘 정치부 기자들의 농담을 들어보면 파키스탄의 현실이 정확하게 드러난다.
파키스탄은 이번달에만도 최소 다섯건의 테러로 상처를 입었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시민들은 경제불황으로 잠 못 이루고 있다. 게다가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대테러전쟁’에 이웃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사회도 휩쓸려 들어 심각한 갈등을 겪는 실정이다. 이러니 시민들은 군사정부한테 선거를 통해 민간으로 정부를 이양하라는 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비록 월드컵이 미국의 공격에 따른 아프가니스탄의 죽음이나, 또는 알카에다 조직과 관련된 것으로 의심받는 파키스탄의 파괴를 잠시 동안 잊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시민들은 애써 그 고통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월30일 월드컵 종료일은 점점 다가오고, 그 월드컵의 환영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공포가 밀려오고 있다.
날마다, 영원히 월드컵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아는 시민들은 꾸역꾸역 다가오는 6월30일을 흥분과 공포로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허전한 질문만 덜렁 남아 있는 기분이다. “파키스탄과 월드컵, 과연 얼마나 우호적인 관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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