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피구에게 부치는 어느 축구팬의 편지… 당신의 황금시대를 다시 열어주길
패장에게 부치는 편지는 어떤 경우라도 가슴이 아픕니다. 더욱이 패배의 수렁으로 밀어넣은 나라의 축구팬이 쓰는 것이라면 한편 위로를 빙자한 조롱이 될 수도 있으므로 그만큼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건 당신이라면 위로의 편지를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카오’부터 개운치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지요.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에게 사실 많이 실망했습니다. 16강 진출을 뒤로 하고 서둘러 리스본으로 떠나가야만 했던, 1승2패의 초라한 성적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라면 차라리 축구의 신에게 가운뎃손가락이라도 치켜올려주고 싶을 뿐, 그 전적표에 대하여는 나 역시 가슴 아플 따름이지요. 나는 포르투갈팀이 마카오에 훈련 캠프를 차렸을 때부터 썩 개운치 않았습니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마카오라면 나 역시 한번쯤 들러보고 싶은 매혹적인 항구이지만 그러나 월드컵의 쟁패를 다투는 전사들이 한가로이 머물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너무 늦게 한국에 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조 리그를 치르는 16개국 가운데 가장 늦게 들어왔으며 부랴부랴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졸전이었지요. 아시아에서는 큰일을 도모하기 앞서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아마 유럽에서도, 그리고 당신의 고국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 거역하고 마카오에서 여유를 부린 포르투갈팀은 미국과의 첫 경기 시작 5분 만에 실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당신은 폴란드의 골문을 네 차례나 뒤흔들 정도로 최강의 전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었지만 그러나 그 지나친 자신감, 그로써 빚어진 허술한 정보와 빈틈이 귀국 행로를 재촉하고 말았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지요. 레알 마드리드에서 우애 깊은 경쟁으로 함께 뛰는 당신의 동료 지네딘 지단의 나라 역시 개막전에서 석패했습니다. 그 상대였던 세네갈은 8강까지 올랐습니다. 이변의 연속은 더 이상 이변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세네갈을 몰랐고 세네갈은 프랑스를 너무 잘 알았습니다. 호화 전세기에 와인 파티까지 겸한 프랑스를 세네갈은 입을 악물고 눌러버렸습니다.
덴마크와의 마지막 분전으로 월드컵에 고별을 한 지단,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피구, 당신의 이름을 월드컵의 아쉬운 역사 속으로 밀어내야 하는 마음은 너무 안타깝습니다. 솔직히 나는 인천경기장의 스탠드에서 당신을 성원하였습니다. 후반전의 시계바늘이 마치 산소호흡기의 애처로운 떨림처럼 조금씩 줄어들수록 나는 조바심으로 입이 말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이상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격전장을 누빈 야전사령관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상대 수비수가 두어명 앞을 막아서도 그냥 치고 들어가거나 아예 강슛을 날렸지요. 그들은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선수가 구릿빛으로 단련된 당신임을 알고는 그저 시늉으로 발을 내밀 뿐이었습니다. 세계 지도를 완성한 당신의 조상들이 그러한 것처럼 칠흑의 바다, 거친 파도 따위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이정표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과 10년이 넘도록 손발을 맞춰왔고 흔한 표현대로 눈빛만 봐도 어떤 공간으로 달려나갈지 잘 아는 ‘황금 시대’의 주인공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날 내가 본 피구는 더 이상 피구가 아니었고 당신의 동료들 역시 그라운드가 너무 넓게만 느껴지는 패배자의 느린 동작들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당신들은 한국축구를 너무 몰랐습니다
포르투갈은 한국축구를 너무 몰랐습니다. 사실 세계 리그를 누비는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로서는 한국의 송종국·이영표·김남일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소한 영문 철자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두세달 동안 나는 포르투갈의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한국축구에 관련된 정보, 특히 선수 개개인의 스타일에 대해 현지 조사를 했다는 그 어떤 보도와 사실도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포르투갈은, 그리고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역시 세계축구의 흐름에 너무도 안이하게 대처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럽 리그가 너무 늦게 끝났고 한·일 두 나라의 기후와 조건에 대해 어두웠으며 한두명의 스타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고 분석합니다. 지단, 바티스투타, 그리고 아마 당신의 이름이 그 대상이지요. 그러나 16강에 안착한 스페인의 선수들, 그들은 지단과 피구, 바로 당신과 함께 5월 초까지 유럽 리그를 뛰지 않았습니까. 잉글랜드·스웨덴·덴마크·세네갈의 선수들도 모두 월드컵 개막 전까지 유럽 리그를 뛰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한·일 두 나라를 빼놓고는 모두들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왔을 정도로 동아시아는 낯선 땅입니다. 그라운드는 공평했습니다. 불운의 원인은 그라운드의 신에게 있지 않고 유럽의 맹호들에게 있었습니다.
한국 속담에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두 발을 사용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 최강을 자처하는 프랑스, 아르헨티나, 그리고 당신의 조국 포르투갈은 두 발은커녕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변화된 세계와 맞섰던 것입니다. 지구 전역의 선수들이 유럽으로 몰려들고 내로라 하는 명장들이 약체국의 사령탑을 맡고 심지어는 국적을 바꿔가면서까지 대표팀을 구성하는 ‘축구의 세계화’, ‘전력의 평준화’가 지난 4년 동안 줄기차게 진행되었음에도 강호들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의 전략과 전술, 심지어 베스트 일레븐 명단까지 바뀌지 않은 채 그라운드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축구화 끈을 바짝 묶어도 공은 빗나갈 수밖에 없으며 약체라고 여겼던 상대 수비가 골리앗보다 더 크게 느껴질 뿐입니다. 아마 당신은 틀림없이 송종국이라는 낯선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송종국은 세계 무대는커녕 한국에서도 불과 1년 전에는 일가친척 외에는 축구선수인지 알려지지도 않았던 무명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송종국을 몰랐고 송종국은 당신을 알았습니다. 전반 내내 당신의 길목을 차단해버리는 송종국을 나는 뜨겁게 성원하면서도 그 탄력을 쫓지 못하는 당신의 느린 걸음에 아쉬웠습니다.
비겨서 함께 올라가자?
리스본으로 귀국한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에 대하여 현지의 언론은, 그리고 세계축구계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만 전해주고 있습니다. 공항에서 냉대를 받았다는 것쯤이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애정의 또 다른 표현’이므로 시간이 해결하겠지만 너무 일찍 퇴장당한 주앙 핀투에 관한 국제축구연맹(FIFA)의 엄격한 제재 소식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당신에 대한 소문도 들려오더군요. 우리의 능란한 미드필더 이영표 선수에게 당신은 전반전 종료 뒤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비겨서 함께 올라가자’는 말을 했다는 보도입니다. 논란이 커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나는 달리 생각합니다. 이는 당신의 축구를 동경하고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라커룸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선수들이 나눌 수 있는 대화 가운데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야 조금 살살 해라’, ‘너희들 오늘 정말 빠른데’, ‘같이 올라가면 좋지 않겠어’, ‘너희들 죽었어, 나중에 화장실로 와’ 따위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선수들 사이의 언어입니다.
더욱이 언론은 처음에 당신이 몸동작으로 그런 의사를 표시했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포르투갈어로, 그리고 영어로 내색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확인의 근거가 불충분할뿐더러 설령 그렇다 해도 어느 경우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요. 승부 조작이란 라커룸에서 이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억울할 수도 있는’ 2장의 레드 카드 때 다혈질의 동료와 심판을 떼어놓았고, 주장으로서 정중한 항의를 했으며 경기 종료 뒤에는 우리 선수와 선의의 악수를, 그리고 히딩크와 포옹까지 나누었습니다. FIFA에서는 패장으로서 성실하게 기자회견에 임한 당신의 인간적 풍모에 대해 이례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그동안 수많은 인터뷰를 했고 그 가운데 많은 것이 당신의 뜻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컨대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이라는 당신의 발표만큼은 성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인 당신이 겨우 한 차례 월드컵에 나와 그것도 서둘러 짐을 싸야만 하는 현실은 축구팬의 입장에서 너무 뼈아픈 손실입니다. 내가 후반전에 당신을 성원했던 것은 우리에게 불쾌한 과거사를 안겨준 미국이 미운 까닭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단, 바티스투타, 그리고 당신의 축구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만큼 쓰라린 비극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격전장에서, 유로 2004에서, 그리고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당신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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