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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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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전사를 보고싶구나

등록 2002-05-09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color="#3399ff">축구읽기 11 ㅣ 선수 별명</font>

<font size="3" color="#a00000">투지·근성 상징하는 별명의 선수 기대… 악의를 품은 별명이면 어떠리오</font>

선수들의 별명은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다.

‘황새’ 황선홍, ‘독수리’ 최용수. 우리는 단번에 두 선수의 공격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황선홍은 우아한 곡선이다. 골을 넣기보다는 공격 찬스를 만드는 데 천부적이다. 미드필드에서 최전방까지 대략 50∼60m의 넓은 공간을 반원을 그으며 아름답게 선회한다. 공을 받아서 결정적 찬스를 만들어도 좋고 수비수 두명이 그의 정교한 커브에 얼이 빠져 뒤쫓아다녀도 좋다. ‘황새’다운 움직임이다. 최용수는 날카로운 직선이다. 공격 포인트를 만드는 데 황선홍의 상상력을 따라갈 수 없지만, 상대 문전 20m 안팎에서 짧게 끊어치며 벼락같이 날리는 슛 감각은 특급이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야수적인 직선의 매력이다. ‘독수리’다운 움직임이다.

외모와 경기 스타일 등 반영

이들뿐이겠는가. ‘적토마’ 고정운, ‘팽이’ 이상윤, ‘노지심’ 이상헌, ‘꾀돌이’ 윤정환, ‘라이언 킹’ 이동국, ‘앙팡 테리블’ 고종수, ‘후반전의 사나이’ 이원식, ‘백상어’ 박성배…. 이처럼 별명만으로 충분히 개개인의 특성을 만끽할 수 있다.

별명은 대개 그 선수의 외모(‘짐승’ 프랑스 마르셀 드사이), 경기 스타일(‘맹견 핏불’ 네덜란드 다비즈), 화려한 전적(‘카이저’ 독일 베켄바워), 출신지 특성(‘보스포로스의 황소’ 터키 수쿠르), 이름 철자의 변조(‘바티골’ 아르헨티나 바티스투타) 등으로 만들어진다. 어디어디의 누구라는 식으로 축구 영웅의 이름에 빗댄 경우도 많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에드 알 오와이란은 ‘사막의 마라도나’로 불렸다.

원컨대 나는 이번 월드컵에 출전하는 우리 선수들의 별명에 카티베리아, 즉 이탈리아 직역으로 말해 ‘악의’가 가득 담겼으면 좋겠다. ‘앙팡 테리블’처럼 족보도 없고 ‘꾀돌이’나 ‘팽이’처럼 귀여운 별명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무슨 성명학 놀이를 하자는 게 아니다. 평범하고 무난한 우리 선수들의 별명 속에 한국 축구의 작은 과제가 담겨 있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고 몇 개월 뒤 한국 축구의 문제점으로 ‘투지와 근성의 부족’을 지적했을 때, 국내 전문가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투지와 근성, 요컨대 불퇴전의 사생결단이라면 우리 선수들이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선수들 아닌가. ‘최우수선수상’보다는 ‘감투상’을 좀더 가치 있게 평가했던 ‘승리 지상주의’ 한국 축구에 대해 ‘투지와 근성’이 부족하다니, 역시 국내 사정에 눈이 어두운 외국 감독이라는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지적한 정신력·투지·근성은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식의 흥분과 격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한국 선수들이 감정 조절을 못하고 쉽게 흥분한 탓에 필요 이상의 움직임으로 후반전을 망치는 고질병을 진단한 것이었다. 그 처방으로 좌충우돌의 ‘막가파식’ 근성이 아니라 냉철한 경기 조율의 바탕 아래 카티베리아, 즉 상대를 제압하는 거친 플레이를 지시한 것이다. 중원의 혈투에서 결코 밀리지 않아야 하고 빈 공간을 장악하여 찬스를 포획하며 순식간에 전광석화의 슛을 날리는 플레이 말이다. 승리의 목표의식이 뚜렷한 ‘문제아’, 상대의 파상공세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사고뭉치’, 중원의 혈투를 일부러 즐기는 ‘싸움닭’, 수비수 서너명은 아랑곳하지 않는 ‘터프가이’.

별명에 걸맞게 거침없는 해결사로

이 점에서 우리 축구도 아일랜드의 로이 킨의 별명에 걸맞은 전사 한명쯤은 필요하다. 잉글랜드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알렉스 퍼거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는 동안 브라이언 롭슨, 에릭 칸토나를 능가하는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칭송한 로이 킨.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을 누르며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룩한 아일랜드 축구 영웅 로이 킨. 그의 별명은 끔찍스럽게도 ‘잔인한 기계’다. 세계 최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까지 맡고 있는 로이 킨은 아마추어 복서 출신으로 사각의 링에서 이미 피의 냄새를 맛본 사나이다. 그는 특유의 거친 몸싸움과 작전상의 일보 후퇴도 용납하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로 영국 프로 리그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온화한 기후와 따뜻한 초원에서 자랐지만 수난의 역사 속에서 강철처럼 단련된 ‘잔인한 기계’ 로이 킨. 지금 당장 우리 축구에도 이와 같은 별명에 걸맞은 냉철하면서도 거침없는 ‘해결사’가 필요하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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