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달군 네티즌들의 상상력… “의료법·병역법 위반 히딩크를 출국금지시켜라”
역대전적 4무10패.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40위. 월드컵 개막을 앞둔 한국팀의 현주소는 초라했다. 온 국민의 기대 속에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을 위해선 축구실력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그 때문일까. 경기장보다 먼저 사이버 공간에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개막을 앞둔 어느 날부터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네티즌의 간절한 비원을 담은 정체 모를 기도문이 인터넷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장난 아닌 ‘단군의 저주’
“전능하사 세계를 하나되게 하신 축구 신과 그 외아들 거스 히딩크 감독님을 내가 믿사오니/ 이는 화란에서 잉태하사 개최국 코리아에 납시고/ 조중동 냄비 찌라시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포화에 맞아 돌아가셨다가/ 장사한 지 석달 만에 A매치에서 다시 살아나사/ 16강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축구 신 옆에 앉아 계시다가/ 명전술로써 돌려붙기에서 살아남은 팀들을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승을 믿사오며/ 거룩한 선수단과 붉은악마 응원단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골을 넣으시는 것과/ 코리아에 귀화하실 것을 믿사옵나이다/ 킥오프.”
16강을 염원하는 네티즌들은 이번 월드컵 공식(?)과자로 새우깡 대신 ‘십육깡‘을 탄생시켰다. 보신탕에 대한 일부 외국인의 반감을 조롱이라도 하듯 선수들을 위한 공식 건강음료로는 ‘갈아만든 개’가 선정(?)됐다. 집안의 대소사를 앞두고 길흉화복을 점쳐보는 것은 당연한 일.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16강 진출에 대한 꿈을 담은 점괘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수리학상으로 보면 16강 진출이 가능하다. 우리 국기가 태극모양이다. 태극은 바로 음과 양을 뜻한다. 1930년 우루과이 대회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72년은 음(36년-북한)과 양(36년-남한)으로 나뉜다.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이 8강에 진출했으니, 이번에는 한국이 8강에 오르는 게 순리다.”
이와 함께 기괴한 소문도 떠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단군의 저주’가 그것이다. 유럽의 강호 네덜란드와 체코가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이유가 “우리나라를 5-0으로 이겼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논리(?)가 네티즌 사이를 파고들었다. 지난 대회 우승국이자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프랑스가 졸전 끝에 1점도 기록하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하면서, ‘저주’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프랑스 역시 한국을 5-0으로 이긴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물결로 거리가 출렁일 때마다 한국축구는 새로운 신화를 쌓아갔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앞 광장은 거리응원의 메카로 자리잡았고, 유럽의 강호를 차례로 물리칠 때마다 사이버 공간은 축구열기로 달아올랐다. 피를 말리는 연장전 승부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본 승부차기. FIFA 랭킹 6위 이탈리아와 8위 스페인을 차례로 잠재우자 열광의 함성은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각종 월드컵 증후군을 호소하는 네티즌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붉은 악마들의 화장실 엽기경험담
운전 중 신호등이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로 보이기 시작하면 초기 증상이다. 다른 차를 앞지르면서 ‘오프사이드’를 염려하거나, 업무시작 전에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를 부르고 싶어진다면 치료를 요하는 단계다. 이쯤 되면 45분 일하고 15분간 휴식을 취해야 하며, 하프타임 때는 상사와 업무에 대해 작전을 짜기도 한다. 정해진 점심시간에 인저리타임을 적용해 커피까지 마시고 들어오는 것은 기본. 동료가 아프다고 하면 ‘시뮬레이션 액션’이 아닌지 의심하며 ‘경고’를 주고 싶어진단다. 왠지 앞서가는 사람을 보면 태클을 하고 싶어진다고 호소하는 네티즌도 나왔다.
거리 응원 열기 속에 여러 시간 생리현상을 참았던 붉은악마 네티즌들의 화장실에 얽힌 엽기 경험담도 속속 등장했다. 길거리 응원에 나섰다가 배탈이 나 화장실에 달려간 아무개씨의 너스레다. “화장실문을 ‘똑똑’ 두드린다는 게 그만 무의식 중에 ‘똑똑똑 똑똑’ 두드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쑥스러워하고 있는데 안에서 일을 보던 사람도 ‘똑똑똑 똑똑’으로 화답하는 게 아니겠어요. 순간 ‘대∼한민국’ 소리가 나올 뻔했습니다.”
기적과 신화창조가 이어지면서 대표팀 히딩크 감독의 인기는 연일 상종가를 쳤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에 얽힌 입담은 인터넷 공간을 점령해갔다. 애초 목표를 뛰어넘어 ‘빗장수비’의 대명사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자 강제귀화 움직임이 일더니, ‘무적함대’ 스페인마저 꺾고 4강에 오르자 ‘히딩크 축구당’ 창당이 운위되기에 이르렀다. 4강전을 앞두고는 한국이 우승할 경우 “히딩크가 지배하는 제정일치 전제군주제 사회가 되고, 학교에서 히딩크 어록을 외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일부 네티즌의 성급한 우려(?)까지 나왔다.
각종 죄목을 거론하며 히딩크 감독을 영구 출국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갔다. 4천만 국민을 들뜨게 해 숙면을 방해했으니 ‘국민수면방해죄’에 해당한다. 세계 최강팀을 연거푸 압도하면서 승리에 도취된 자영업자들이 공짜 음식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막대한 영업상 손실을 입히고 보험사엔 재정악화를 불러오게 했으니 ‘영업방해죄’다. 국민의 엔도르핀 수치를 기하급수적으로 높여 환자들의 질병이 호전돼 병원 및 제약사들의 매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으니 ‘의료방해죄’요,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젊은 선수들을 16강 진출로 군을 면제받도록 사주했으니 ‘병역법’까지 위반했다. 그러니 히딩크 감독의 안전귀국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경기마다 이어지면서 선수들의 활약상을 빗댄 각종 광고문구도 등장했다.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한국축구가 과연 잘할까 하는 생각으로 손발이 떨리고 가슴 조일 때 국민해소 영양제로 유명한 ‘히딩크 제약’의 안정환(丸)을 권합니다. 초조, 불안감을 해소하는 안정환. 불안할 때 먹는 약 안정환. 식후 30분, 하루 한알! 안정환은 이천수(水)와 함께 드시면 더욱 좋습니다.”
“독일전 시작 앞서 1분간 묵념하자”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한국축구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대표팀의 경기력은 세계축구계의 지형을 흔들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토털사커’와 브라질의 ‘삼바축구’, 프랑스의 ‘아트사커’에 이어 승승장구하는 한국축구를 가리켜 ‘쇼킹축구’로 부르자”는 주장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전에 이어 스페인전에서도 편파판정 시비가 일자, 일부 네티즌들은 해외 언론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각종 반박글을 번역해 전파하는 발빠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지난 6월19일 이탈리아의 한 웹사이트(http://www.nottimondiali.rai.it)에서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이 알려지면서, 삽시간에 국내 네티즌들이 투표에 참여해 설문 초기와는 달리 압도적인 차이로 ‘정당한 판정이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또 4강전을 앞두고는 미 <cnn>이 준결승 진출국을 대상으로 우승후보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하자, 과반수에 가까운 네티즌이 한국을 우승후보 0순위로 선택해 ‘인터넷 강국’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온 나라가 환희와 열정에 들떠 보낸 6월. 통신공간의 작은 동호인 모임에서 출발한 붉은악마는 수백만 인파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거리마다 춤추고 있었다. 열기가 정점에 다다를 무렵, 네티즌들의 성찰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축구에 쏟는 관심의 반의 반만이라도 이번 선거에 기울였어야 했다.” ‘키티’라는 아이디를 쓴 네티즌은 다음카페 ‘한국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게시판에서 자기 반성을 시작했다. “한국과 독일의 4강전이 열리는 6월25일, 경기 시작에 앞서 선수와 붉은악마 모두 1분간 묵념하는 시간을 두자.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자.” 네티즌 ‘할말 있어요’의 제안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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