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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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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네 힘을 보여줘!

등록 2002-06-06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size="3" color="#a00000">월드컵의 정치적 악용, 유럽 클럽과의 갈등… 그래도 검은 대륙은 열광한다</font>

2002 월드컵 본선 32개 출전국 중 아프리카 대륙에서 5개국이 참가했다. 프랑스와 개막경기를 갖는 월드컵 첫 출전의 세네갈,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4번 우승과 시드니올림픽 우승에 빛나는 카메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포기 이후 30년 만에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 스포츠계에 다시 등장한 남아프리카공화국(그래서인지 몰라도 팀의 별명이 ‘소년’이라는 의미의 바파나 바파나이다), 왕독수리(Super Eagles)라는 별명을 가진 애틀랜타올림픽 우승국 나이지리아, 마지막으로 약간 힘이 빠진 듯한 카르타고의 독수리 튀니지 대표팀이다.

“보너스 안 주면 훈련 못한다”

아프리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팀들의 별명이 사자나 독수리에서 온 것이 인상적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순박한 느낌을 준다. 세네갈팀의 애칭인 ‘테랑가의 사자’에서 테랑가는 세네갈 현지어인 월로프어로 ‘환영, 환대’의 의미를 갖는다.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개최되는 월드컵을 맞아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가 하나가 되는, 아프리카의 테랑가와 동양적 손님 환대 문화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프랑스-세네갈 개막전 시작에 앞서 벌써 세네갈의 ‘이름값’을 한 사건도 발생했다. 한 세네갈 선수가 대구에서 금목걸이 절도로 조사를 받은 것이다. 자신의 출생지인 세네갈을 상대로 프랑스 국기를 달고 뛰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패트릭 비에이라 선수도 빼놓을 수 없다. 개막전에서 세네갈은 프랑스를 1 대 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누구나 5개 아프리카 참가국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최대인구(1억2700만명)를 자랑하는 나이지리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한 지 10년째를 맞이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카르타고 제국과 한니발 장군의 역사를 간직한 튀니지 등 모든 국가가 나름의 특색을 갖고 있다.

카메룬은 선수들의 월드컵 참가 보너스 문제와 의회선거가 걸려 있다. 국민들의 여망을 안고 일본에 무사히 도착해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을 줄 알았던 선수단이 축구협회의 보너스 지급과 관련된 갈등으로 인해 월드컵 참가를 보이콧하자 국민들은 분노했다. 결국 훈련에 참가했지만 열악한 재정상태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과거 시드니올림픽에 참가했던 나이지리아 축구선수단이 귀국 비행기표가 없어 마냥 호텔에 머물러야 했 사건은 아프리카의 빈곤 상황을 잘 보여준다. 다행히 맥주회사인 영국의 기네스사에서 어느 아프리카 국가라도 월드컵에 우승할 경우 100만달러를 상금으로 지급하고, 준결승 진출시 1만파운드, 결승 진출시는 1만5천파운드의 보너스를 카메룬팀에 약속하는 것으로 보너스 문제가 해결됐다. 또한 카메룬은 6월23일 의회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계속되는 야당의 선거 연기 요구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이번 선거를 강행하려는 이유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축구로 돌리려는 의도다. 아프리카에서 월드컵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세네갈팀은 ‘프랑스 군단’이라 불릴 정도로 23명 엔트리 멤버 중 21명이 현재 프랑스 리그에서 활동 중인 선수들이다. 프랑스와 세네갈 간의 밀접한 식민지 역사를 보여준다. 7살 때 세네갈을 떠나 20년 만에 다시 고향을 찾은 페르디낭 콜리 선수, 전혀 가본 적도 없이 단지 할아버지가 세네갈 출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세네갈 국기를 달고 뛰는 실베인 은디아예 선수, 한살 때 세네갈을 떠나 지금은 프랑스인이 다 되었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100% 세네갈인임을 느끼는 라민 디아타 선수…. 식민지의 아픔이 느껴지는 선수 구성이지만 세네갈에는 월드컵 첫 출전의 영광을 위하여 대통령까지 동원된 열광적인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월드컵에 맞춰 졸속 선거

남아공은 올해가 30년 동안 국제 스포츠계에서 추방되었다가 국제축구연맹에 다시 복귀한 지 10년째 되는 해이고,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연속 2번째 참가하는 해이다. 10년이 지났지만 선수 구성에서 흑백갈등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표팀 스태프 중에 아프리카 전통을 지키기 위해 ‘인양가스’라는 전통 주술사를 포함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튀지니팀은 아프리카와 아랍을 대표하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성적이 가장 저조하다. 말리에서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대회에선 무득점 예선탈락의 불명예를 안은 채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다. 4명의 외국감독을 교체하면서 결국은 현지인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바야 선수나 셀리미 선수의 선전에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98년 프랑스월드컵 개막경기에서 스페인에 3 대 2로 승리함으로써 아프리카의 긍지를 보여준 나이지리아는 올해 죽음의 조라 부르는 F조에서 애틀란타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축구는 빵에 대한 고통과 정치적 불만을 해소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카메룬의 경우처럼 정권은 국민의 관심을 축구에 집중시키고 정치에서 아주 멀어지게 한다. 월드컵을 통한 국민의 정치적 우민화라고 볼 수 있다. 튀지니는 5월26일 대통령 정년을 75살로 연장하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치렀다. 알제리는 월드컵 개막식 전날인 5월30일 의회선거를 치렀다. 이런 사실은 월드컵과 관련된 정치적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유럽축구 구단과 아프리카 축구협회 간의 갈등도 해묵은 문제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경기에 유럽 구단주들은 우수선수를 쉽게 보내려고 하지 않고, 아프리카 축구협회 입장에서는 한명이라도 더 좋은 선수를 영입해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수 개개인이 인격체이기보다는 몇억원짜리 상품으로만 인식되는 상황에서 선수들은 구단주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올해 아프리카 축구연맹 총회는 2006년 월드컵부터 별도의 예선전 없이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상위 4개팀과 별도로 선정된 1개팀이 월드컵에 참가하도록 했다. 이로써 예선전 참가로 인한 선수들의 심리적 부담과 유럽 구단주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게 다. 그러나 ‘프랑스 군단’이라 부르는 세네갈팀은 만약 구단주들이 절대 선수들을 대표로 보낼 수 없다고 버틸 경우 전혀 대책이 없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훌륭한 선수들이 외국에 가지 않고 현지에서 활동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유럽구단 소속 축구학교에서 맡아왔던 축구교실을 아프리카 현지에서 운영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후진 양성과 축구의 저변 확대, 튼튼한 선수층 확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수에 의존하는 기존의 시스템은 오래 갈 수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세계 축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선수들을 흡수할 수 있는 매력은 없다. 유능한 선수나 지도자들이 은퇴 뒤 고국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하는 길은 재정보조나 애국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계권 상업화, 볼 권리를 빼앗다

국민들의 ‘볼 권리’도 중요한 문제다. 다소 정치적으로 이용되긴 하지만, 올해 튀니지인들은 모든 월드컵 경기를 공중파 방송을 통해 오전에 생중계 2경기, 야간에 녹화 2경기를 볼 수 있다. 월드컵 전 경기를 하루에 2번씩 시청하면서 6월 한달을 허송세월(?)하는 것이다. 반면 일부 국가에서는 중계권의 독점계약 때문에 일부 경기를 유료로밖에는 볼 수 없다. 월드컵 중계권의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의 꿈이었던 축구조차도 이제는 돈 없이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나친 경기중계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볼 권리라는 측면에서 튀니지의 조치가 지지를 얻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인해 한국이나 일본을 직접 방문할 수 없는 아프리카의 월드컵 팬들에게 최소한 텔레비전만이라도 전 경기를 중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가난, 일상의 고통, 전쟁, 정치적 압박…. 아프리카 인들은 커피숍에 모여 친구들과 같이 고함을 지르고, 공감대를 느끼고 멋진 골장면에 모든 고통을 잊고 희열을 느낀다. “아프리카 1호골은 세네갈의 엘 하지 디우프, 아니면 카메룬의 터프가이 리고베르 송의 멋진 슛으로!” 오늘도 아프리카인들은 외친다. “알레 아프리카!”(아프리카 전진)

튀니스(튀니지)=김병국 통신원 ibn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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