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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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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주의를 주의하라!

등록 2002-05-30 00:00 수정 2020-05-03 04:22

축구이야기 13 ㅣ 월드컵과 문화

동서의 형식적 통합은 소통 그르쳐… 원시적 폭발력 배가하는 사전 행사를

당신은 (boom)을 들어본 적 있는가. 미국의 인기 팝스타 아나스타샤의 노래로 이번 월드컵의 공식주제가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열린 조추첨대회 당시 잠깐 들어본 뒤로 나 역시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88올림픽 때 코리아나의 처럼 싫어도 억지로 들어야 했던 것과 달리 이번의 은 적어도 취향에 맞지 않는 음악을 민방위훈련 통지서 받듯이 떨떠름하게 들어야 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피파와 거래를 튼 소니 음반사에서도 탐탁지 않은 일인 듯 이번 개막행사에 소속 가수 아나스타샤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축구, 그 자체를 냉혹하게 즐기려는 ‘진정한 축구팬’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오든 말든, 이라는 노래로 기온이 조금 오르든 말든 개의치 않고 경기장의 열기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다만 국가적 행사요 문화 월드컵이라고들 하면서 이렇게 철저히 ‘공식주제가’가 외면당하는 모습은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공식주제가와 마스코트는 어디로 갔나

당신은 이번 월드컵 마스코트를 알고 있는가. 만화영화의 캐릭터 인형을 대량 복제하여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들에게 팔아먹는 일은 솔직히 이성 있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번 월드컵에서는 마스코트마저도 찬밥신세라고 하니 그 또한 다행이다. 같은 이름의 포르노사이트 때문에 애초의 ‘아트모’를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는데 아토(ATO), 니크(NIK), 케즈(KAZ)가 그들이다. 마스코트라는 기이한 문화형식이 정착된 이후로 가장 형편없고, 따라서 인기도 없는 이 디지털사이버 우주동물은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최하고 개최국들이 장소와 시설을 빌려주는 월드컵 진행과정이 빚은 가장 우스꽝스런 사례가 될 것이다. 한·일 두 나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세계 보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겠다고 했으나, 이 세 개체는 곰돌이 푸나 토토로는 고사하고 슈렉처럼 엽기적인 미학도 지니지 못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이름의 저 먼 행성에서 공을 차며 대립과 화해의 장난을 친다고 하는데, 그 시나리오 또한 한·일 두 나라의 문화는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편의 감수성으로 대접받기 어려운 조잡한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당신은 월드컵 개막식 행사를 보았는가. 아직 타임머신이 발명되었다는 보도는 없으니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행사 담당자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짤막한 시놉시스를 밝힌 것외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중요한 것은 개막행사의 특성상 완벽한 보안 속에서 ‘그 누구의 검증도 받지 않고’ 당일 한 차례만 열린다는 점이다. 물론 누가 맡더라도 이 같은 작업조건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깜짝쇼’를 근간으로 하는 거대한 개막행사를 사전에 여러번 시연할 수도 없고, 당일 행사에서 실수가 있다고 해서 개막행사를 제헌절이나 추석 때 한번 더 열 수 없다는 점에서 담당자들에게 매우 엄중한 책임의식이 요구된다. 국가 대사를 맡았다는 애국심만이 아니라 숙명적 ‘유일무이성’이 요구하는 엄중한 예술가적 소명의식이 필요하다.

세계 보편의 감수성에 초점 맞춰야

지난 88올림픽 당시 장일순 선생은 “우리 삶의 솔직하고 진실한 측면은 찾을 길 없고 전통이란 이름 아래 온통 형식적인 것들만 얼렁뚱땅 엮은 것들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아직 열리지도 않은 행사를 두고 미리 꼬집을 수는 없지만 행사 담당자들, 특히 총연출을 맡은 손진책씨의 인터뷰로 미뤄보건대 이어령식 ‘문화주의’, 이를테면 동서를 양분하고 그쪽의 포크와 우리의 젓가락을 ‘거대한 상징’으로 확대하여 이러한 속성의 흥겨운 시소타기를 ‘소통’이나 ‘만남’이라는 그럴듯한 주제로 포장하는 아주 낯익은 비교문화적 접근이 엿보인다. 물론 이러한 접근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더욱이 아직 열리지도 않았으니 모든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통을 형식적인 요소로 치장한 문화주의, 동서문화의 속성을 확대해석한 문명론, 불철저한 나눔을 ‘극복’한다는 식의 어정쩡한 ‘소통’으로 그칠까봐 그 점이 염려된다.

솔직히 월드컵이 ‘축구대회’인 이상 축구에서 ‘사전행사’란 불필요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경우라 해도 가급적 짧은 시간 안에 끝내는 것이 좋다. 월드컵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행사가 앞머리에 놓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 해도 그 행사들이 축구의 단순하면서도 원시적인 폭발적 에너지를 반감시키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개막행사도 ‘이 기회에 한국 문화를 널리 알린다’는 조급한 목적의식보다는 세계 보편의 감수성에 친절히 인사하는 ‘좀더 세련된’ 그리고 가급적 빨리 끝내는 것이면 좋겠다.

정윤수 l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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