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 color="#a00000">옛 식민지 모국 프랑스의 오만을 일거에 꺾은 가난한 나라 세네갈의 기적과 저력</font>
한국보다 9시간 느린 이곳에서 5월31일 낮 12시쯤, 갑자기 들려오는 함성에 놀라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 경기가 시작된 지 30분쯤 지나 엘 하지 디우프의 멋진 돌파에 이어 파프 부바 디오프의 골이 프랑스 수비진과 골키퍼 사이로 네트를 가르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월드컵 때문에 방학도 앞당겨
큰길에는 여전히 차 한대 다니지 않았고, 사람들도 TV 파는 가게 앞에만 몰려 있을 뿐 걸어다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2, 3분 정도 계속된 함성이 멎고 경기가 속개되면서 다카르 시내는 다시 깊은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후 1시30분께 경기가 끝나자마자 세네갈 민중축제가 곧바로 시작되었다. 다카르 시내 번화가 아브뉴 라밍게이, 퐁피두 리퍼블릭 등 이를테면 서울이라면 시청 앞 광화문 네거리 또는 세종로 등에 해당할 거리는 순식간에 젊은이들로 모든 차선들이 꽉 메워지면서 교통소통이 마비되었다.
언뜻 몇천명은 넘어보인다. 아니 몇만명이 되는지도 모른다. 언제 그렇게 빨리 준비했을까. 대부분 사람들이 녹색과 노란색, 빨간색의 삼색 세네갈 국기를 들거나 몸에 감싸고 있다. 많은 여자들은 삼색 천으로 만든 머리띠를 동여매고 나왔다. 남녀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오늘 경기에서 뛴 선수들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채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한다.
프랑스의 승리를 일관되게 예측해온 세상의 모든 축구전문가들과 달리 그들만은 이렇게 이길 줄 알고 미리 축제를 준비한 것일까? 하긴 지난해 12월 조 편성이 결정되었을 때 세네갈의 와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개막전에서 세네갈이 1 대 0으로 이긴다고 예언하긴 했다. 그러나 그때는 물론 대부분 믿지 않았고 또 곧바로 잊힌 이야기였다.
리옹 상피옹(사자의 승리)! 얼레 리옹(사자 파이팅)! 비브 세네갈(세네갈 만세)!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이제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의 물결은 자연스럽게 대통령궁으로 들어가는 막다른 대로로 흘러들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을까. 세네갈의 전통 북인 탐탁을 연주하는 팀이 신나게 북을 때리기 시작했다. 상상해보라. 수천, 수만명의 젊은 남녀가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온몸을 흔들며, 춤추며 노래하며 대통령궁에 다가서는데 몇명 되지 않는 오토바이 탄 경찰들과 대통령궁 근위대 경비병들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대부분의 군중들이 함께 모여 대통령궁 입구 쪽 대로를 점령하자 이제 다른 대로들은 교통이 소통되면서 경적을 울리는 차량들과 오토바이 폭주족들의 잔치마당이 되었다.
군중들이 대통령궁에 다가서자 대통령이 나왔다. 그는 축하 메시지를 낭독하고 이날 오후 세네갈 전체 휴무를 선언했다. 그리고 수상과 함께 무개차에 올라 많은 군중과 함께 아주 천천히 시내를 한 바퀴 도는 행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여기서는 이미 대부분의 학교가 월드컵 스케줄 때문에 예년보다 한달 정도 빨리 방학에 들어갔다. 특히 이날 5월31일은 은행을 포함해 모든 관공서가 오전 10시께 문을 닫았고, 상가도 완전히 철시한 상태였다. 대통령이 특별히 휴무를 선언하지 않았어도 과연 오늘 오후 일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우리가 얼마나 좋은지 모를걸!”
대통령이 무개차로 군중들과 행진하면서 시내의 주요 도로가 다시 완전히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다. 온 시내 길 한복판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골을 넣었을 때 그라운드에서 함께 모여 잠시 보여주었고 또 경기 종료 직후 선수들과 응원단들이 더 신나게 보여준 승리의 춤을 군중들은 추고 또 추었다.
오후 4시께 대통령 일행이 궁으로 돌아오고도 약 두 시간 더 궁 앞에서 잔치가 계속되더니 마침내 군중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해산하면서도 아쉬움이 남는지 “세네갈 샹피옹”(세네갈 참피언)을 외치며 달리고 또 달렸다. 한 젊은이를 붙들고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당신은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내 눈에는 세네갈 사람들 대부분이 매우 가난하게 보인다. 굳이 국민소득이나 구매력 등 통계를 들추지 않더라고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때로 딱하게 느껴질 정도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사는 데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저 연중 큰 변화 없이 무덥기만 한 기후 탓일까. 천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느긋한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떤 때는 꿈도 소망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축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온 국민을 그렇게 미친 듯이 열광시킬 수 있을까.
이제 다시 경기내용을 잠깐 한번 들여다보자. 세네갈은 100년 이상 프랑스 식민지였고 지금까지도 정치·경제·군사·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그러나 세네갈의 젊은 우상들은 그들에 대한 어떤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없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플레이를 자신 있게 펼쳤다. 쓸데없이 거칠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냉정하고 당당하게 맞섰다.
오히려 프랑스 선수들이 경기가 안 풀리자 거칠게 때론 비신사적으로 나올 때가 많았다. 트레제게가 날린 슛이 골대를 맞고 나온 순간, 화면 속의 그는 다른 경기 때와는 달리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선 프랑스 선수들의 자만심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팀의 패배를 알려준 예고탄이었다.
대부분의 가난한 세네갈 사람들은 작든 크든 프랑스 사람, 또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이나 패배주의 또는 피해의식이 있다. 그러나 세네갈의 젊은 영웅들은 그들의 젊은 패기와 도전으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어느 누구와도 맞서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그들은 체력도 전술도 조직력도, 그리고 경기 운영능력도 세계 챔피언인 프랑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와드 대통령이 수탉을 먹은 이유
그뿐일까. 세네갈의 승리는 세네갈만이 아니라 블랙 아프리카 전체의 승리임을 주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표정에서 분명히 읽을 수 있다.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나 토고의 로메, 그리고 말리의 바마코에 사는 아는 사람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5월31일은 개막전이 열릴 뿐이었는데도 대부분 휴무였고 그곳 번화가들도 “세네갈 샹피옹”이란 구호로 오랫동안 시끄러웠다고 한다.
수천년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세계사의 주류에 들지 못한 채 변방에만 머물러온 블랙 아프리카를 축구가 구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프랑스와 세네갈 축구경기를 통해서 그들의 영웅들이 보여준 당당한 승리와 경기 뒤 세네갈 국민의 축제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세네갈 아니 아프리카는 이제 새로운 자각과 도전을 시작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그들의 남다른 패기와 열정으로 아프리카를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꿈을 꿔본다. 5월31일 저녁 와드 대통령은 저녁식사로 닭요리를 준비시켰다고 한다. 프랑스팀의 상징이 수탉이다. 그는 세네갈팀의 상징인 리옹, 즉 사자가 닭을 잡아먹은 기쁜 소식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카르(세네갈)=장준/ 현지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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