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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의 혈전, 죽음의 투혼

등록 2002-04-25 00:00 수정 2020-05-03 04:22

<font color="#3399ff">축구읽기 9 l 선수의 비극</font>

<font size="3" color="#a00000">어느 축구 선수의 어이없는 죽음에 대하여</font>

혹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기혼남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잉글랜드의 베컴, 그는 지금 부상병동에서 신음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베론, 아일랜드의 로이 킨, 독일의 다이슬러, 포르투갈의 루이 코스타도 부상병동으로 실려갔다. 가벼운 어깨 탈구라지만 황선홍의 부상 징크스도 걱정이다. 부상은 축구 선수들에게 치명적인 적이다. 절정기의 나이에 그라운드를 등져야 한다는 것은 직업선수로서의 활동 중단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그 뒤의 삶을 살아가는 데도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

100년 동안 축구장에서 1천여명 사망

육체의 격렬한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축구장은 끔찍한 부상, 때로는 허망한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기도 한다. 국제축구연맹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0년 동안 축구장에서 1천여명이 죽고 2천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 관중의 지나친 열기에 의한 압사 또는 폭력 난동들로 인한 것이었다. 지난 64년 5월 아르헨티나와 페루전에서는 주심의 판정에 불만을 품은 페루 관중에 의해 촉발된 폭동으로 무려 318명이 죽었고, 82년 10월에는 모스크바와 네덜란드의 클럽팀 경기에서 종료 직전 골이 터지자 퇴장하던 관중들이 한꺼번에 얼어붙은 복도로 재진입하다가 340명이 압사한 일이 있다.

천재지변은 아예 응급조치마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잠시 허망해진다. 넓게 트인 축구장에 벼락이 떨어져 발생하는 비극이 그렇다. 니카라과·남아공·콩고 등에서 그런 어이없는 죽음이 있었다. 특히 98년 10월 콩고에 떨어진 벼락은 선수 11명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놀랍게도 희생자는 모두 홈팀 선수들이었다. 반면 원정팀 선수들은 한명도 다치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가 미신을 믿고 경기 승패에 주술을 걸기도 하는 콩고의 민속적 특성상 원정팀의 주술에 의한 재앙이라는 후문까지 낳았다.

‘미필적 고의’로 비극을 낳은 예도 많다. 북아일랜드의 어느 아마추어 선수는 경기 도중 상대 골키퍼를 주먹으로 때려 숨지게 하였고, 이번 월드컵의 아프리카 지역 예선 과정에서 나이지리아의 어느 대표선수는 가나와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자 음독 자살하기도 했다. 지난 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기록한 콜롬비아의 에스코바르는 그 골 때문에 내기에서 진 조직폭력배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6월, 미 공군의 미사일 침공으로 이라크 북부 모술시 인근의 축구장에서 경기를 하던 어린이 선수단과 관중이 23명이나 죽는 비극도 있었다.

이런 예는 약간은 불가항력적인 변수들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경기 상황에서 선수가 죽는 경우는 안전조치만 제대로 취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인재이다. 지난 1975년 9월 ‘새마을돕기 연예인 축구대회’에 출전했던 영화배우 허장강(당시 52살)씨는 전반 20분을 뛰다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지고 말았다. 당시 유일한 스포츠지였던 의 기사에 따르면 현장에는 의료진도 없었고, 고인은 탈의실에서 영화계 후배들의 비전문적인 간호를 받았을 뿐이다.

명배우 허장강씨의 어이없는 비극이 일어난 지 2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축구의 대제전이라는 월드컵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지난 4월17일 강원도 속초에서 열린 2002 춘계대학 연맹전. 숭실대의 김도연 선수는 후반 23분 교체 멤버로 들어오자마자 공중볼을 다투다 충격을 받았고, 3분 뒤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 선수가 쓰러질 당시 경기장에는 당연히 준비되어야 할 구급차가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축구 행정

주최 쪽은 앞선 경기에서 부상선수를 치료하다 빈혈로 쓰러진 간호사를 후송하기 위해 구급차가 떠난 사이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료진이나 구급차가 현장에 없으면 즉시 경기를 중단하고 적절한 응급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한 점, 더욱이 당시 축구장에는 공을 차면 바람에 의해 되돌아올 정도로 강한 황사바람이 불었고, 시멘트 바닥처럼 딱딱한 맨땅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축구협회와 대학축구연맹의 안이한 운영은 충분히 비난받아 마땅하다.

월드컵 준비에 분주하다. 안전 월드컵에 만전을 기한다고 한다.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선수와 관중의 안전을 위해 각종 보험까지 들어놓았고 시설물 하자나 관중 난동에 따른 피해를 막기 위한 갖가지 대처도 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월드컵 경기장 바깥은 최소한의 안전대책조차 없는 무방비의 혈전들뿐이다. 정강이 보호대와 불굴의 투혼만으로 맨땅에 온몸을 던지는 선수들. 그게 우리 축구의 현실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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