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024년 11월7일 대국민담화에 이은 기자회견을 했다.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전과는 다른, 반성과 참회의 의미가 분명한 자리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어찌 됐든 대통령이 “제 주변의 일로 국민들께 걱정과 염려를 드렸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 드린다”며 말문을 열었으니, 물을 수밖에 없다. 무엇에 대해 왜 사과하는 것인가?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말하기 좀 어렵다”며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사과”라고 했다. 청자가 알아서 알아들어야 할까?
최대 관심사인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답변을 짧게 요약하면 이런 얘기였다.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은 검찰이 기소도 하지 못했고 특검은 위헌적이라 수용할 수 없다. 명태균씨는 경선 초기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나 곧 연락을 끊었고 한 차례 전화를 받은 일은 있으나 공천개입 등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김건희 여사가 사적으로 일상적 연락을 몇 차례 이어간 바는 있는데 역시 부적절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국민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영부인의 공개 행보는 자제할 것이다.’
흥분 지수가 높아졌는지,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듯했던 서두와는 달리 대통령은 일문일답에 이르러선 장판파에서 눈을 부라리고 선 장비에 가까워졌다. 답변에 내포된 논리도 ‘잘못된 일은 없었다’에서 ‘그깟 게 뭐 그렇게 문제냐’는 쪽으로 종종 기울었다. 무슨 뜻인지 알 듯 모를 듯 한 얘기도 나왔다. 선거 때 잠들어 있는 사이에 김건희 여사가 대통령 휴대전화 메시지에 대신 답한 일이 있다는 등의 발언이 그렇다.
이날 기자회견은 ‘마지막 기회’라는 게 보수적 논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은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첫째, 특검을 수용하겠다. 둘째,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권력을 분점하고 이 과정에서 영부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정리되도록 하겠다. 셋째, 특검의 수사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겠으며, 대통령직을 내놔야 할 사안일 경우 그렇게 하겠다.’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윤석열 대통령의 이날 기자회견은 또 한번의 ‘정치적 참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가령 대통령이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 “침소봉대는 기본이고 없는 것까지 만들어서 그야말로 저를 타깃으로 해서 제 처를 악마화시킨 게 있다”고 한 걸 보라.
이런 사태는 예고됐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는 10월26일 토요일치 신문 1면에 ‘尹대통령·보수, 디커플링 시작됐다’고 썼다. 여론조사상 대구·경북 지역의 대통령 지지율 하락세가 심상찮은데 김건희 여사 논란과 ‘윤-한 갈등’이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갤럽의 정기 여론조사(10월29~31일 전국 만 18살 이상 유권자 1005명 대상, 무작위 추출된 무선전화 가상번호에 대한 전화 조사원 인터뷰 방식,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및 한국갤럽 누리집 참조)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19%를 기록한 것은 11월1일이었다. 명태균씨와 통화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성이 공개된 것은 10월31일인데, 한국갤럽은 이 사안이 조사에 충분히 반영된 것은 아니라고 해설했다. 추가 하락이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보수 진영은 난리가 났다. 정계 원로들은 물론이고 친윤계 일각에서조차 “대통령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얘기를 앞다퉈 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임기 반환점도 돌지 않은 시점에 20% 벽이 깨진 건 어떤 기준으로 봐도 예삿일이 아니다. 이미 총선 패배로 의회를 장악할 기회는 날아간 상태인데 여론마저 이 모양이라면 여당의 협조를 구하기도 어려워진다. 당연히 정부 운영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신속하게 지지율을 복구하지 않으면 남은 임기 절반을 식물 상태로 보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치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들이 이 정권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게 문제라는 식이었다. 11월4일 낮까지도 “정치 공세에 휘말리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일의 성과를 가지고 말하자”는 대통령의 발언이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공유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채널A) 이런 인식은 두 가지 면에서 기만적이다. 첫째, 지지율 하락은 지난한 개혁의 진통이 아니라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부정부패에 대한 의심과 그것을 감싸기만 하는 대통령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했다. 원인과 해법이 맞지 않는 거다. 둘째, 국민적 지지가 없으면 개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건 상식이다. 이 상황에 “개혁의 성과로 말하자”는 말은 ‘그냥 가만히 있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불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태도다.
그런데 놀랍게도 11월4일 밤, 대통령의 태도는 극적으로 변했다. 밤 10시가 거의 다 된 시각,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을 7일에 열기로 결정했다는 속보가 전해진 것이다. 이전까지 대통령실은 기자회견 등을 11월 내에 추진하겠다고 했었다. 급할 게 없다는 태도여서 여의도 주변에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재판 결과를 지켜보고 움직이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런 방침이 갑자기 뒤집히다니, 어찌 된 일인가?
대통령의 변심(?)은 참모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 같다. 윤석열 대통령의 최종 결심은 11월4일 저녁 식사 이후로 추정되고, 주무 부서라 할 수 있는 홍보수석실에 기자회견 계획이 전달된 것도 밤 9시께가 돼서다. 임기 반환점을 도는 시점의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이라는 중차대한 결정이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뤄진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이 의문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난무하자 11월5일 추경호 원내대표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에게 국외 순방 전에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 개최의 필요성을 건의했고 이게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그런 비슷한 건의를 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요는 ‘방아쇠를 누가 어떻게 당겼느냐’는 건데, 추경호 원내대표의 설명은 이 대목에서 불분명하다. “대통령이 고심하다 밤에 최종 결심한 것으로 안다”는 말은 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추경호 원내대표의 행보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돼 파장을 낳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추경호 원내대표가 용산에 방문해 의견을 전달했는데 알고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몰랐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대통령과의 회동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상황은 ‘한동훈 패싱’으로 받아들여졌다.
추경호 원내대표의 행보가 한동훈 대표를 의식한 것이라면, 그래야 할 이유는 뭘까? 11월4일 한동훈 대표는 나흘간의 침묵을 깼다. 이 ‘나흘’이란 명태균씨에게 김영선 전 의원의 공천을 약속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성이 공개된 이후의 공백이다. 이날 한동훈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 김건희 여사의 활동 중단, 용산 참모진 전면 교체 및 특별감찰관 임명, 전면 개각 등을 요구했다. 상식적 수준의 판단을 하는 정권이라면 같은 날 밤에 이뤄진 대통령의 결단(?)을 한동훈 대표의 요구에 대한 화답으로 포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경호 원내대표와 용산의 참모들은 ‘한동훈 대표가 아니라 내 덕분’이란 주장을 했다.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 요구에 밀려서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있지 않았다면 연출할 이유가 없는 장면이다.
결국 반성은 없고 온통 자기중심적 계산뿐이다. 이런 식이니, 기자회견이 잘될 리가 없다. 진정성 있는 대응으로 성난 시중 여론을 수습해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대통령의 머릿속에 없었고, 단지 지지율 하락을 의식한 사과 장면의 연출 정도를 의도했던 게 아닌가?
동아일보는 대통령의 결심 배경에 대해 “김건희 여사가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여사가 사과를 권유했다고 언급하며 굳이 “이것도 국정 관여고 농단은 아니죠?”라고 덧붙였다. 농단 여부를 떠나,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는 게 핵심인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 사안을 김건희 여사 또는 이른바 ‘김건희 라인’과 논의한 거라면,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또 하나의 정황 증거로 비칠 수밖에 없다.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않은 듯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그래서 왜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기자회견은 ‘마지막 기회’마저 걷어차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상황은 용산의 시스템 부재 또는 붕괴를 시사한다. 대통령 탄핵이나 하야, 임기 단축을 주장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 중에는, 물론 정치적 주판알을 튕기는 음모가도 포함됐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시스템을 무시하고 망가뜨리는 식의 무도한 국정운영에 대한 경계심을 가진 사람도 꽤 있다. 이러한 경계심은 빠른 속도로 임계점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이 문제의 해결을 거부한다면 이제 여당이 이들의 문제의식에 응답해야 한다. 그런데 한동훈 대표는 주변에 “내가 있는 한 대통령이 탄핵당할 일은 없을 것”(신지호 전 의원)이라고 하고 ‘특검 수용은 탄핵의 문을 여는 것’이라는 식의 당내 일각의 인식에 사실상 동조하는 듯한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이제는 여당이 책임져야 할 때다. 대통령이 공천개입을 시사하는 자신의 육성이 나왔음에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식의 주장을 하고, ‘조사를 두 번 받는 것은 인권유린이므로 특검은 수용할 수 없다’며 배우자 관련 의혹을 감싸는 것은 특검 사안인가, 아닌가? 이 심플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참모들은 왜 윤 대통령 기자회견 말리지 않았나?
제주서 침몰한 129t 대형 어선…2명 사망·12명 실종
목줄 매달고 발길질이 훈련?…동물학대 고발된 ‘어둠의 개통령’
[영상] 윤 기자회견 특별진단…“쇼킹한 실토” “김 여사 위한 담화”
여성 군무원 살해한 남성 장교, 신상공개 결정에 ‘이의 신청’
미 연준 기준금리 0.25%p 인하…파월 “트럼프가 요구해도 안 물러나”
11월 8일 한겨레 그림판
[국제발신] 499,500원 결제완료…불법문자 28억개 범인 잡았다
윤 대통령 때문에…‘김건희 행위’가 국정농단인지 답하게된 국립국어원
[사설] “이런 대통령 처음 봤다”, 이젠 더 이상 기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