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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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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사과를 봐서 참아요”

금순이가 보낸 사과 팔러 나간 평창초등학교 운동회, 싸움이 났는데…
등록 2020-12-22 21:46 수정 2020-12-23 10:44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생전 처음 시작한 장사가 운 좋게 첫날부터 잘돼서 용기 내어 한 달 동안 열심히 뛸 수 있었습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아서 고민도 많이 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생각지 못했는데 여러 사람이 도와줘 장사할 수 있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은 것까지 얼마

부탁한 일도 없는데 큰올케가 어린 아들을 돌봐줬습니다. 내가 집을 비우는 날에는 아침 일찍 데리고 가서 저녁 늦게 데려다줬습니다. 아들은 외사촌 형들과 어울려 집에 올 생각도 안 하고 놉니다. 한 달 동안 아이가 많이 컸습니다. 큰오빠도 출퇴근길에 항상 들러서 돌봐줬습니다. 큰오빠나 올케는 한 번도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말없이 도와줬습니다.

큰올케는 나보다 한 살 많은데 정말 어른스럽습니다. 아마 내가 평생 갚아도 못 갚을 사랑의 빚을 진 것 같습니다. 장날 어머니한테 빌린 돈을 갚으면서 이자도 계산해 드렸습니다. 속으로 이자가 아까워서 벌벌 떨며 드렸는데 다행히 이자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장난감이 재고로 많이 쌓일까봐 걱정했는데, 재고가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똘마니 아줌마들한테 팔다 남으면 재고를 받아주기로 했는데 다들 악착같이 잘 팔아서 반품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충북 제천 도매상에서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운동장 장사로 번 돈으로 남편은 발을 넓혀 서울 가서 물건을 해왔습니다. 지방 도매상 물건보다 많이 싸고 종류도 더 다양했습니다. 문구류는 종류가 많아서 정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아직도 물건 이름을 다 못 외웠습니다. 계산서와 일일이 대조하며 숫자가 맞는 것으로 골라 진열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찾는데 어떤 것인지 모르는 물건이 많습니다. 물건 이름을 조사하느라 많이 밤샘해야만 했습니다. 영업하면서 진열하니 일이 더 진전이 없이 사흘이나 걸려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빈 상자 없이 물건을 알차게 꼭꼭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방구석까지 물건이 차지했습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장사다보니 별별 아이가 다 있습니다. 아이들은 크는 중에 누구나 한 번씩 작은 도둑질을 해보는 것 같습니다. 훔치러 오는 아이는 눈치가 다릅니다. 훔치다 들키면 물건을 순순히 내놓는 아이도 있고 아니라고 우기는 아이도 있습니다. 물건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가만두었다가 계산할 때 거기 주머니에 먼저 넣은 것까지 얼마라고 말합니다. 할 수 없이 같이 계산하는 아이도 있고 돈이 모자란다고 내놓는 아이도 있습니다. 자주 와서 슬쩍 집어가는 아이가 있는데, 그 집 엄마가 우리 아이는 절대 양심이 발라서 어디 가서 도둑질 같은 것은 안 한다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 엄마한테는 아이 손버릇이 나쁘다고 얘기하지 못했습 니다.

금순이가 보낸 사과 네 상자

어떤 여학생은 샤프를 눌러보고 써보고 사갔습니다. 다음날 얼굴이 빨개가지고 와서 아줌마 이거 가지고 가서 보니 망가져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 미웠지만 참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안 바꿔주는데 너는 단골이니까 바꿔준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평창을 떠날 때까지 친구들과 함께 찰떡같은 단골이 되었습니다.

평창초등학교 운동회날입니다. 파란 사과를 팔고 가 소식이 없던 금순이가 느닷없이 사과를 부쳐왔습니다. 큰 상자로 네 개나 됩니다. 과수원 일을 하면서 못난이 사과를 팔아보려고 모았는데 남편이 극구 말려서, 나한테 싸게 팔아도 되니 팔아보라고 보냈답니다. 못생겼어도 맞은 좋다고 했습니다. 보내려거든 미리 부치든가, 운동회 점심시간도 지났는데 물건이 왔습니다.

평창초등학교 운동회에는 안 가려 했지만, 사과를 팔러 갔습니다. 운동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학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를 깔고 수북이 사과를 쏟았습니다. 어떤 아줌마가 맛 좀 보자고 하더니 한 개를 다 깎아 먹고 사지도 않고 그냥 갔습니다. 과일장사 아저씨가 씩씩거리며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와서 소리칩니다. “아줌마, 무슨 과일까지 팔아!” 반말 지껄입니다. “평창 돈을 혼자서 다 벌려고 그래~” 하며 시비를 겁니다. 평창에선 과일은 자기 혼자 팔라고 무슨 특허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술 한잔한 것 같습니다. 무슨 큰 싸움이라도 난 줄 알고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속으로는 벌벌 떨면서 큰소리쳤습니다. “아저씨, 내가 싸워줘야 하는데 사과를 봐서 꾹꾹 참아요” 했습니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었습니다. 그렇게 대단하던 아저씨는 슬금슬금 도망갔습니다.

사과는 아직 마수(맨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도 못했는데 걱정입니다. 어떤 아줌마가 10개만 산다고 하더니 싸게 파니 한 보따리 사갔습니다. 주정뱅이 아저씨 덕분에 모였던 사람들이 사과를 사갔습니다. 사람들 심리가 싸게 파니 더 싸게 사고 싶어 합니다. 전체를 파서 뒤집어 고르려고 합니다. 작은 상자에 30개, 50개씩 나눠 담았습니다. 낱개를 사는 것보다 상자로 사면 훨씬 싸게 팔았습니다. 한 상자 사서 나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술 취한 아줌마 둘이 한 상자 샀습니다. 서로 큰 것을 가져가겠다고 싸우며 나눕니다.

무지 먹고 싶은 불량식품

사과를 얼른 팔고 운동회 구경을 하고 싶습니다. 빨리 사과를 다 팔면 조카애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고 계주를 뛸 때 응원도 해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때깔이 좋지 않아서 다 팔리지 않습니다. 가게 이웃집 아줌마들이 학교로 사과를 싸게 팔러 갔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물건이 싼 것이 있으면 이웃부터 알려야지, 그만 팔고 집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잼도 만들고 두고 먹는다고 사과를 나누어 갔습니다. 잊어버리고 나 먹을 것도 없이 팔아버릴 뻔했습니다. 이웃 덕분에 내가 먹을 것도 남기고 잼도 만들었습니다.

온 가을을 운동회 마당에 다니면서 운동회를 구경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이웃 덕분에 사과를 빨리 팔아서 아들 손을 잡고 운동회 구경을 갔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큰조카의 계주 뛰기만 남았습니다. 조카애 둘은 만나자마자 “고모 불량식품 사줘” 합니다. 불량식품이 뭐냐 하니 쫀디기랍니다. 무지 먹고 싶은데 엄마가 불량식품이라고 안 사준답니다. 그거 한 번 먹는다고 큰일 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쫀디기 맛이 괜찮습니다. 한 움큼씩 쥐고 둘러서서 신나게 빨아 먹다가 빵을 사들고 오는 큰올케한테 들켜서 압수당했습니다.

가을에 제일 맛있는 새콤달콤한 빨간 홍옥을 사 먹으며 계주 뛰기를 구경했습니다. 큰조카애가 계주를 뛸 때는 먼지가 뽀얗게 나는데도 가까이 가 사람들 틈에 끼어 마음껏 소리치며 응원했습니다.

전순예 45년생 작가·<강원도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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