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 회사는 서울 강남역 부근 고층건물이 많은 주택은행 골목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다닌 회사에서는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여기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주방업계 초창기부터 일했다는 부부도 세 쌍 있었습니다. 세미나 강사로 일했다는 한 강사는 큰오빠보다도 나이가 많았는데 넉넉하고 인상이 좋았고, 에이전트인 방 여사도 나보다 나이가 위인데 시원시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새로 간 회사에서 취급하는 주방기구는 우주선을 만드는 자강석이 들었다는 까만 유리질의 실라간이라는 냄비세트였습니다. 냄비는 고급스럽고 예쁜데 너무 비싸서 누가 사겠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어떻든 도전해보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첫 강습을 소개받았는데, 살림살이에 별 관심도 없이 덜렁거리는 아줌마가 자기네 집에 와서 요리강습을 꼭 해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없지만 성의껏 준비해서 갔습니다.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제 맞은편에 앉아서 이것저것 열심히 물어봅니다. 강습할 때도 설명 중에 끼어들어 자꾸만 물어봅니다. 아줌마들이 자기들끼리 눈짓하면서 누구냐고 합니다. 주최 쪽 아줌마가 홀아비인데 냄비 사서 장가가려고 그런다고 합니다. 남자의 행동이 마치 요리강습을 방해하려는 사람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화내기도 싫은 내색을 하기도 곤란해서 “아저씨, 강습이 끝나면 아저씨만 별도로 가르쳐드릴게요” 하며 달랬습니다.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한데, 강습 도중에 이렇게 음식을 맛있게 많이 해 먹였는데 못 팔면 어떻게 하냐고 미리 초 치는 아주머니도 있습니다. 강습이 끝나자 아주머니들은 냄비는 좋은데 너무 비싸다고 사지도 않으면서 와글와글 말이 많습니다. 도무지 정신이 없습니다.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도 처음 본다 싶었습니다.
아저씨는 강습이 끝나자 정말 풀세트로 샀습니다. 자기는 냄비가 너무 좋아서 사기는 하는데 잘 못 쓸 것 같다고 걱정합니다. 커터기 쓰는 것도 어렵고 압력솥 쓰는 것도 아주 어려워 보인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냄비를 사면, 사람을 모아 올 테니 자기네 집에 와서 요리강습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요리를 잘 배워서 친구들과 술 한잔 하게 술안주 만드는 법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냄비가 비싸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요리강습은 이어졌습니다. 서울 천호동의 빌라에 사는 아기 엄마가 요리강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 집에 요리강습을 갔는데, 친정엄마와 함께 아주 백발의 할머니가 같이 왔습니다. 아기 엄마는 가만히 자기 엄마한테 “저 할머니는 뭐 하러 와?” 했습니다. 친정엄마가 “사람 집에 사람 오는데 사람 차별하는 것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백발의 할머니는 강습 도중 먹는 것도 빠진 이 사이로 흘리면서 먹었습니다. 아기 엄마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대했습니다.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는 할머니요리강습이 끝나자 할머니는 냄비세트를 다 달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치마를 걷어 올려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똘똘 말아 넣은 돈을 꺼냈습니다. 할머니는 막내딸 시집갈 적에 해주려고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이라고 했습니다. 막내딸 좋은 살림 장만해서 시집 잘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아주 소원을 이루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늦둥이 딸이 시집가게 됐답니다. “내가 세상 물정을 잘 몰라 이렇게 좋은 냄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아무 냄비나 사서 시집보내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찍 출근한 어느 날, 사람들이 “공포의 포니투다~” 하며 건물 밖 회사 골목 주차장 앞에서 술렁댔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어떤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낡은 포니투를 끽~ 끽~ 소리를 내며 아슬아슬하게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외제 차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차를 박을까봐 골목에 기다리고 있다가 아주머니가 주차를 다 하니 들어갔습니다.
포니투는 우리 회사 방 여사 차인데 면허 딴 지 한 달 만에 운전 연습을 하려고 아주 헐값에 사서 몰고 나왔답니다. 차가 허름하니 어디 부딪혀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방 여사는 이전에 보석 장사를 해서 고객이 많다고 했습니다. 자기 고객에게 우주선 재질로 만든 특별한 냄비가 나왔다고 해서 한번 팔아보려고 일부러 회사에 취직했답니다. 강습 잘하기로 소문난 한 강사와 짝을 이뤄 함께 일하기로 했답니다.
방 여사는 강사들이 요리 재료 준비를 하느라고 콩나물 대가리를 버린 것을 주우면서 아무나 보고 이것 좀 빨리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걸 뭐 하려 줍냐고, 그냥 버리라고 하니 밥하면 맛있다고 합니다. “콩나물 대가리 넣고 밥하면 먹기만 해봐라. 입을 싹싹 비벼놓는다” 하며 열심히 콩나물 대가리를 주워 밥하고, 집에서 싸온 반찬을 펴놓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밥 먹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불러야 일이 잘된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은 뒤 전화기를 잡고 앉아서 아주 시끄럽게 전화합니다. ‘추라이’ 하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누구 엄마여, 나 좀 오라고 해봐~” 그러면 정말 오라고 합니다.
방 여사는 남들은 하루 한 번 강습 잡기도 힘드는데 하루에 두 팀씩 강습합니다. 방 여사와 한 강사는 아주 신이 났습니다. 덜렁거리는 방 여사와 차분한 한 강사는 매일 고가의 냄비를 팔았습니다. 회사 사람들은 그래도 나름 다 경력이 있었습니다. 자기네는 주방업계에서 베테랑이라고 은근히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방 여사라는 나이 많은 ‘추라이맨’을 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 좀 오라고 해봐요~” 그 방법이 좋다고 너도나도 시도해봤지만 누구도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방 여사 덕분에 날마다 회사 분위기는 활기가 넘쳤습니다.
여러모로 북새통을 이루던 방 여사는 몇 달 뒤 하얀 엘란트라를 끌고 나타났습니다. 그동안 실라간 냄비를 열심히 팔아서 새 차를 현찰로 샀답니다. 한 강사는 낡은 흰색 프레스토를 타고 다녔는데 방 여사와 같이 은색 엘란트라를 현찰로 뽑았습니다. 비싸서 잘 안 팔릴 거라던 고정관념을 깨고 나도 쏠쏠하게 실라간 냄비를 팔아서 살림에 보탬이 됐습니다. 운전 못하는 거로 유명했던 ‘공포의 포니투’의 주인도 차를 바꾸고 나선 누가 운전하는지도 모르게 운전하게 됐고 주택은행 골목도 조용해졌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 1945년생 작가가 많은 것을 사고팔며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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