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강습 장소를 소개한 것만으로 너무 쉽게 냄비 세트를 받고 나니 아주 회사에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전문으로 일한다면 요리강습은 얼마든지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말에 저녁 식사를 하며 나는 휘슬러 회사에 들어가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은 다 반대했습니다. 여태껏 죽을 뻔하고 앓다가 이제 겨우 살아났는데, 집에서 살림만 해도 버거울 판에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찌 그리 쉬울 수만 있겠나. 그래도 건강해졌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주부를 상대하고 제품이 좋고 고가여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설득했습니다.
혼자 생각에는 마진도 아주 좋을 듯했습니다. 회사에 입사하기도 전에 첫 요리강습에 성공할 수 있는 장소도 물색했습니다. 예식장 폐백실에 다니는 발이 넓은 옆집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일부러 점심을 잘 차려 아주머니를 초대했습니다. 웬일로 이렇게 점심을 잘 차렸냐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웃에 살면서 식사도 한번 같이 못해서 오늘은 일부러 점심 준비를 했노라고 많이 드시라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내가 냄비 회사에 입사하려는데 요리강습을 할 장소를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첫 시작이니 실패하지 않고 꼭 살 만한 집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강습 장소를 제공한 집에는 사은품도 많이 주고 아주머니에게도 선물을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리강습을 주선할 때 받은 에이전트의 명함에 회사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회사에 무작정 전화해서 일해보고 싶다고 하니, 이력서를 가지고 와보라고 했습니다. 회사에 찾아가니 실무 과장님이 몇 마디 물어보고는 나를 사장실로 데려가서 소개해줬습니다. 사장님은 다른 외판보다 주방기구를 파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니, 그럼 한번 해보라고 합니다.
보통은 에이전트와 요리강사가 짝을 이뤄 일하는데, 나는 처음이니 강습이 잡히면 그날 일이 없는 강사가 지원해주는 체제로 하기로 했습니다. 마진이 좋을 거라 기대했는데, 마진은 30프로이고 그중에서 강사비로 10프로를 뗀다고 했습니다. 판매금액의 20프로를 갖는 장사였습니다.
출근하니 사무실에는 내 책상과 전화가 있었습니다. 나를 ‘전 여사’라고 부르며 명함도 새겨주고 각종 카탈로그도 주었습니다. 밑천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면 취직은 잘한 것 같았습니다. 나와 같은 날 입사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30대로 ‘이 여사’라고 했습니다. 이 여사는 유능한 사원의 소개로 입사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중학교 생물 선생님으로 10년 동안 근무했고 최근에는 중학생 과외 공부를 지도하다가 와서 아는 사람이 아주 많았습니다.
허탕을 치자 돌변한 강사회사에 입사하고 옆집 아주머니가 소개해준 집에서 첫 요리강습을 열었습니다. 젊은 아기 엄마 집이라 강습을 보러 온 지인들도 아기 엄마들이어서, 세 살 다섯 살 되는 아이가 7명이나 왔습니다. 아이들이 다쳤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아이들을 열심히 데리고 놀았습니다. 첫 요리강습을 한 강사는 그동안 소개해서 성사된 강습에서 몇 번 본 분으로, 회사에서도 베테랑 강사라고 했습니다. 요리강습 결과가 좋았습니다. 지금껏 경험으로 봐서 무슨 일이든 첫 번에 성공하면 그 일은 순조로웠습니다. 길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기양양해서 두 번째 강습을 열었습니다. 나를 잘 아니까 또 지원해주겠다고 늘 하던 강사가 강의했습니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사는 자기는 강습만 열면 어떻게든 많이 판다고 큰소리하더니, 허탕을 치자 돌변했습니다. “살 사람인지 안 살 사람인지 구분도 못하고 강습만 열면 되는 줄 알아요?” 40대 중반인 나를 보고 “노인네가 말이야, 슬슬 소개나 해주고 선물이나 챙기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쪼르르 입사하고 보니 어디 잘됩디까?” 하며 나무랐습니다. 나는 무슨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누구 소개로 간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전화해서 입사했기에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회사 출근은 오전 9시까지입니다. 잠시 회사 지침을 듣고 강습이 있는 사람들은 강습 장소로 가고, 강습이 없는 사람들도 ‘추라이’(try, 요리강습 추진)를 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같이 입사한 이 여사는 한참 여기저기 전화하고 목적지를 정하고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나도 남들이 나갈 때 사람들 틈에 끼여 사무실을 나옵니다.
나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는 이웃들은 입사하기 전 남을 소개해줘서 다 해먹고 없습니다. 이 여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묻지를 마, 정처 없는 이 발길이여” 하며 무조건 전철을 타고 가다가 아파트가 많이 보이는 지역에 내렸습니다. 대치동의 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카탈로그에 명함을 붙여 돌렸습니다. 점심도 못 먹고 오후 4시가 되도록 돌렸는데 야속하게도 누구 하나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그 아파트 앞을 지날 때는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다음날은 상계동 쪽에 당시 다니던 순복음교회의 노원구 지성전이 있다기에 무조건 상계동 쪽 전철을 타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철은 많이 복잡했습니다. 나이가 꽤 많은 남녀 7명이 내 앞으로 쭉 서서 이야기하며 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가다가, 서 있는 사람 중 나이 많은 여자분에게 앉으시라고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명함이 붙은 카탈로그를 드렸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여자분은 내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와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무조건 상계동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여자분은 자기는 말죽거리 교회 목사인데 상계동에 있는 성도 집으로 첫 심방을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네를 따라가서 예배를 같이 드리고 점심을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성도네 집에 가니 처음 보는 나를 반가워해줬습니다. 목사님은 카탈로그의 내 이름을 보시고는, 전순예씨가 좋은 사람 많이 만나서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줬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그 집의 성도님이 자기네 아파트 단지가 넓으니 나가보라고 했습 니다.
힘없이 아파트 앞을 걸어가는데 소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여자 둘이 서로 점심 교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부녀회에서 가을 김장 소금을 판매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마침 교대한 사람이 아파트 부녀회장이었습니다. 사람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요리강습을 소개해주면 판매액의 10프로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부녀회장이 반장들한테 소개해줘 가구수가 많은 복도식 아파트의 층별로 강습할 수 있었습니다. ‘정처 없는 이 발길’도 많이 걸으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 1945년생 작가가 작은 것들을 사고팔며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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