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접대가 은행 자판기 커피였던 민 여사

한센병 음성 환자 정착촌을 소개해준 ‘보험왕’, 밥을 사준다고 해도 거절하던 어머니 같은 분
등록 2022-05-21 08:48 수정 2022-07-26 04:22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서울 강남구 삼성동 보험회사에서 강습할 때 민 여사님을 만났습니다. 민 여사님은 70살인데 보험왕도 하는 능력이 많은 노인네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민 여사님은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주방기구 살 일은 없고 자신이 보험료를 많이 받아오는 특수 마을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민 여사님은 내일 자기네 회사 앞에 있는 주택은행으로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민 여사님은 은행에서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 한 잔 뽑아주면서 이것 마시고 얼른 가자고 했습니다.

민 여사가 고깃국 끓여 대접해 마련한 강습

버스를 타고 찾아간 곳은 경기도 용인 수지에 있는 한센병 음성 환자 정착촌이었습니다. 민 여사님은 그 동네가 만들어진 초창기부터 드나들어서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다 안다고 합니다. 그곳 주민은 대개 1세대 원주민으로 착실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민 여사님은 “전 집사의 남편이 지금 신학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이니 잘해주세요” 하며 나를 소개했습니다. 당시 우리 남편은 늦은 나이에 신학대학에 들어가 청년 시절 꿈이던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아주 우호적이었습니다.

그 시절 정부 정책으로 한센병 음성 환자는 전국 조용한 산골마을 150곳에 정착시켜 양계장을 짓고 닭을 길러 먹고살게 했답니다. 양성 환자는 소록도로 보냈답니다. 그러다가 정부가 양계장을 다 개인에게 불하했다고 합니다. 점점 도시화하면서 땅값이 오르니 모두 다 양계장 터에 공장을 지어 세를 놓았습니다. 그때가 1980년대 말인데 노인 혼자 살면서 보통 공장 세로 500만~600만원 내지 1천만원을 받는 집도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86살의 이 권사님 댁이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혼자 살기 때문에 언제라도 누가 들여다볼 수 있게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산다고 했습니다. 민 여사님은 무언가 잔뜩 들고 간 꾸러미를 풀더니 고깃국도 끓이고 밥도 하고 자기가 주인인 양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수지에서 첫 강습은 이 권사님 집에서 했습니다. 비슷한 마을인 내곡동에서 대박이 났기 때문에 회사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수석 강사를 붙여줬습니다. 한여름에 요리강습을 갔는데 노인들이 다 버선을 신고 왔습니다. 촌 노인네들이 요리강습을 한다고 하니까 예의 차리느라 버선을 신고 왔나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발가락이 없어 양말로는 가릴 수 없어서 여름에도 버선을 신고 살았던 것입니다. 눈썹은 문신을 짙게 하고 손가락 마디가 없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고객이 고령이기는 하지만 돈이 많아서, 신기한 냄비를 보고 많이들 샀습니다.

요리강습을 한 다음날입니다. 냄비를 사간 정 권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소스팬에 국을 올린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냄비에서 시꺼먼 연기가 나고 있더랍니다. 급한 맘에 찬물에 냄비를 담갔더니 치~지직 하면서 열판이 홀라당 떨어졌답니다. 수지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정 권사님은 불에 탄 냄비를 보여주며 “그래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 하면서 회사 가서 수단껏 새 냄비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직 사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 자기가 많이 팔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강사를 데리고 오지 말고 전 집사가 강습도 직접 해달라고 했습니다. 정 권사님의 남편은 젊은 사람이 벌어먹고 살려 애쓰는데 자기가 잘못해놓고 그렇게 손해를 보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열판이 떨어진 냄비를 싸들고 회사로 왔습니다. “나 그 동네 갔다가 맞아 죽을 뻔했네요. 어제 산 냄비가 망가졌다고 새 냄비 내놓으라네요” 하니 회사는 새 냄비로 바꿔줬습니다.

5ℓ 솥에 갈비찜, 압력솥을 번쩍번쩍

정 권사님은 약속대로 자기네 집에서 강습을 열어줬습니다. 정 권사님은 무엇이든 칭찬하고 자랑하며 냄비를 파는 데 바람잡이 노릇을 잘해줬습니다. 심지어 이전에 온 강사는 말이 너무 빠르고 ‘훌레버꾸’(정신없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모양)를 쳐 사기꾼 같다고도 했습니다. 전 강사가 차근차근 알아듣게 설명을 잘해주고 요리도 더 많이 해주고 더 맛있다고 칭찬했습니다. 고객이 고령층이니 요리강습을 할 때마다 물렁한 것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보통 강습 때는 3ℓ 솥에 했는데 여기서는 5ℓ 솥까지 동원해 삼계탕도 하고 갈비찜도 했습니다. 호박 등 채소를 다져 닭 위에 올리고 동시에 죽을 만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요리를 하다보니 무거운 압력솥도 한 손으로 번쩍번쩍 들었습니다. 강습이 끝나니 어깨가 엄청 쑤시고 아팠습니다. 그래도 강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정 권사님이 여러 번 요리강습을 열어준 덕분에 마을에서 냄비를 안 산 집이 없었습니다.

민 여사님은 바쁜데도 여러 번 요리강습에 참석해줬습니다. 민 여사님이 많이 고마웠습니다.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사은품도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점심이라도 한 끼 같이 하자고 해도 절대 사양하셨습니다. 민 여사님은 “그까짓것 얼마나 번다고 점심 사고 찻집에 가서 차 마시고 다니면 돈 못 번다” 하셨습니다. 시내에서 만날 때는 꼭 은행에서 만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얼른 일어나 일하러 가셨습니다. 안 지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무슨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도록 나에게 잘해주셨습니다. 수지까지 버스를 같이 타고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민 여사님 남편은 서울대를 나와 큰 기업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 5·16 군사정변이 났는데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회사에서 감원당했습니다. 그때부터 배가 아프다며 일하지 못하고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워 산다고 합니다. 민 여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남편 병구완하며 자식들 키우느라 아주 짜고짜고(아끼며) 살았다 합니다. 여자가 일할 곳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보험을 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대학까지 가르쳤다고 합니다. 큰아들은 회사 중역이 되고 딸은 시집가서 잘 살고 작은아들은 자기 사업을 잘하고 산다고 했습니다. 나를 보면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용기 잃지 말고 꿋꿋하게 잘 버티면 좋은 사람도 만나고 좋은 세상도 온다고 했습니다.

밥 한 끼 대접 못하고 소식 끊긴

그렇게 씩씩하기만 하던 민 여사님이 어느 날 아주 힘없어 보였습니다. 나를 만나자 “전 집사야, 영감이 돌아가셨다” 하십니다. 아랫목을 지켜주는 것이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혼자 그 집에 들어갈 수 없고 혼자 살 용기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걸 정리해서 큰아들한테로 갈까 하다가 다음에 만났더니 딸네 집으로 갈까 작은아들네 집으로 갈까 했습니다.

민 여사님을 만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연락해봐도 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신세만 많이 진 민 여사님께 밥 한 끼도 대접 못하고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을 찾습니다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은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문방구에서 방판(방문판매)까지,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게 두려웠던 새댁이 사람들 앞에서 요리를 시연하고 명함을 돌리며 소개를 통해 냄비를 파는 세일즈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칼럼입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은 적 없고,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여러 팔 것을 바꿔가며 하루의 휴일도 없이 집안을 건사해간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절대적 노동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딸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바랍니다. 간략한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겨레21>은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모아서, 20세기 여성 노동을 재구성할 예정입니다. 전자우편 anyone@hani.co.kr로 보내주세요. 2022년 8월7일까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