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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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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다던 부부를 화해시킨 압력솥

사람이 아니라 냄비가 요리하는 요리 강습을 주선해 냄비 세트를 받다
등록 2022-02-09 07:01 수정 2022-05-20 01:43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서 병든 채 천호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발목을 삐는 건 흔한 일인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다리를 절고 이제는 여러 합병증으로 아주 몸져누웠습니다. 아파트 전세금을 빼서 내 약값으로 다 쓰고 천호동 그것도 아주 사연이 많은 어느 집 지하방으로 이사했습니다. 시골에 집도 있고 땅도 있지만 부동산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살자니 아프고 돈도 없고, 죽자니 어린애를 셋이나 놔두고 죽을 수 없었습니다. 고작 하는 일은 누워서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 몸이 70퍼센트는 물이라고 하더니 울어도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꼭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몸져누운 지 4년 만에 기적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 좋은 꽃냄비를 어떻게 써볼까

하루는 앞집에 사는 새댁이 자기네 집에서 요리 강습을 하니 구경을 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양은냄비를 쓰고 살았습니다. 그나마도 냄비 손잡이가 망가져 바꿔야지 마음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강습에서는 휘슬러라는 냄비를 가지고 요리를 요술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냄비에 재료를 넣고 김만 나면 요리가 다 돼서 나왔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약식도 김만 오르면 5분 내로 뚝딱이었습니다. 사람이 요리한다기보다는 냄비가 요리했습니다.

요리 강습을 하는 동안 맛있는 여러 음식을 먹어볼 수 있었습니다. 요술처럼 요리해내는 냄비는 좋은 만큼 아주 고가였습니다. 요리 강습 장소를 제공한 새댁은 형편이 넉넉해 냄비를 풀세트로 샀습니다. 무척 탐나는 냄비였지만 내 형편으로는 사볼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요리 강습자의 명함을 받아들고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좋은 꽃냄비를 써볼 수 있을까 연구했습니다. 다음날 전화해서 요리 강습을 열어줄 테니 판매액의 10퍼센트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장소만 제공하고 사람을 모아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웃집에 부탁해 강습을 열었습니다. 판매액의 10퍼센트를 돈으로 주는 줄 알았는데 물건으로 줬습니다. 그래도 처음 강습을 연 날 물건이 많이 팔려서 3리터 압력솥을 하나 받을 수 있었습니다. 냄비 세트가 갖고 싶었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강습 장소를 제공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강습을 열 집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옆집에 아들하고 사는 할머니한테 “할머니네 집에서 요리 강습 한번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해봤는데 할머니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며 와서 하라고 했습니다. 요리 강습 장소를 제공한 할머니는 젊어서 보석 장사도 하고 여러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봤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요리 강습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좋은 냄비가 다 있다니 나도 사야겠다” 하면서 커터기도 사고 냄비 세트도 산다고 했습니다. “할머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커터기나 하나 사세요” 하고 말렸습니다. 할머니는 “아니래. 나도 좋은 냄비 한번 써보고 죽어야지” 했습니다. 할머니네 형편을 뻔히 아는데 괜히 요리 강습을 하자고 했나 후회스러웠습니다. 할머니는 끝내 아들 카드를 꺼내 냄비 세트를 열 달로 긁었습니다.

쌀을 압력솥에 담고 먹을 때까지 10분

살림살이에 무척 관심이 많은 앞집 새댁이 있었습니다. 새댁은 직장을 다니다 결혼해서 살림을 무척 잘하고 싶어 했습니다. 시집은 시아버지가 사업하고 신랑도 직업이 좋아서 단독주택 건물에 살았습니다. 거저 준 것도 아니고 판 것인데도, 새댁은 나를 통해 타파웨어를 사고 “아줌마, 고맙다”고 인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애경유지 외판을 할 때 삼익아파트에서 소개받은 것이었습니다. 살림이 너무 예뻐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새댁이니 휘슬러 냄비를 보자 당장 사고 싶어 했습니다. 힘 안 들이고 요리 강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새댁은 그날 소개한 제품을 몽땅 샀습니다. 300만원 넘는 돈을 카드로 결제했습니다. 새댁은 손아래 동서한테 자랑해 동서도 냄비를 사고 압력솥도 샀습니다.

한 달 뒤 카드 고지서가 나오자 새댁네 남편이 난리가 났습니다. 남편은 이 여자가 살림살이를 300만원어치나 카드로 긁었다고 시어머니한테 일렀습니다. 나이 어린 동서를 꼬드겨 동서도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냄비를 사게 했다고 집안 망하게 할 여자라고 했습니다. 누나들한테도 일일이 전화해 냄비 산 얘기를 하면서 이혼한다고 했답니다. 새댁은 남편이 그렇게 쩨쩨한 사람인 줄 몰랐다며 자기 쪽에서 이혼하겠다고 했습니다.

티격태격 한창 싸움하는 동안 남편 회사에서 야유회를 갔습니다. 새댁은 야유회 전날 저녁 남편을 불러 냄비 쓰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쌀을 씻어 압력솥에 담고 먹을 때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큰 압력솥에는 맛있게 재운 갈비도 담아주었습니다. 예쁜 타파웨어 통에는 온갖 식재료를 차곡차곡 담아줬습니다. 새댁 신랑 팀은 야유회에서 좋은 냄비로 밥도 하고 갈비찜도 하고 낙지볶음도 하고 온갖 음식 잔치를 다 했는데, 다른 팀은 아직도 밥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팀들이 이 팀은 어떻게 이렇게 빨리 해 먹을 수 있냐고 구경을 왔더랍니다. 역시 팀장님네는 살림살이도 다르다고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새댁 신랑은 야유회에서 돌아와 자기 아내가 이렇게 똑 부러지게 살림을 잘하는 사람인 줄 미처 몰랐다고 많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랍니다.

남 소개해도 욕먹지 않는 제품

이렇게 한 달 동안 열심히 요리 강습을 열었더니 자다가도 소원인 휘슬러 냄비 세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냄비 ‘사용 후기’를 들어보니, 휘슬러 냄비는 내가 써도 후회가 없고 남을 소개해줘도 욕먹지 않을 좋은 제품임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장사가 이 정도로 잘되면 소개해줄 게 아니라 내가 아주 회사에 입사하면 아무래도 떼돈을 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회사에 입사할 수 있는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 1945년생 작가가 작은 것들을 사고팔며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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