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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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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판매 벨 누를때 손이 떨렸다

서울의 아파트 입주 뒤 물비누 외판원으로 돈벌이
등록 2022-01-06 13:46 수정 2022-01-07 01:55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서울 강동구 고덕동 배재중학교 뒤에 시영아파트를 지어 입주를 시작했습니다. 1984년 어느 여름날, 새벽 4시에 일어나 짐을 싣고 고덕시영아파트 20동으로 이사했습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 맨 뒷동이라 산이 가깝고 공기가 맑아서 좋았습니다. 아직 여름방학 전이어서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며칠 동안 자양동까지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파트 단지 들어가는 길목에 우유, 훼미리주스, 신문 등 배달하는 사람들에 계란장사도 있었습니다. 하나둘 장사꾼이 생기더니 없는 것 없이 많이 생겼습니다. 나도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친정엄마가 딸네 집에 온다는 핑계로 도라지 한 가마니를 갖고 오셨습니다. 엄마는 잠도 안 주무시고 밤새워 도라지를 까고 찢어서 손질했습니다. 다음날 손질한 도라지를 한 근씩 달아 봉지에 쌌습니다. 손이 저울같이 한 줌 쥐어 올리면 한 근입니다. 그러더니 엄마는 나보고 도라지를 팔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같이 가는 줄 알고 기다리는데 “왜 빨리 안 가나” 하십니다. 엄마는 같이 안 가느냐고 하니 “그까짓 것을 혼자 못 팔고 같이 가나. 나는 마저 까고 있을 테니 혼자 팔아오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길목 장사들 틈에 끼여 도라지를 팔았습니다. 엄마는 도라지 한 가마니를 잔뿌리 하나도 버리지 않고 알뜰히 벗겨 다 팔자 그날로 가셨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도라지·풋고추 길목 장사

친정엄마는 뜬금없이 더덕도 부치고 가을이면 풋고추도 한 가마니씩 부쳐서 팔아보라고 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서 친정엄마가 보냈다고 좀 싸게 파니 잘 팔렸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 식구가 먹었습니다. 서울에서 사먹는 것보다 나도 싸게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 동 501호에 이사 온 집에는 우리 아들과 동갑인 쌍둥이 아들과 아래로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다보니 자연히 엄마들끼리도 친해졌습니다. 쌍둥이 엄마는 아주 생활력이 강해서 무엇을 하든지 놀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식용유 한 초롱을 사와서 열 명에게 나누어 팔았습니다. 가게에서 한 병씩 사는 것보다 싸니 사람들이 사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병 분량이 남는 걸 자기네가 먹는다고 합니다. 쌍둥이 엄마는 무엇을 하든지 한 달에 20만원 벌이는 해야 아들 가르치고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몰라서 그렇지 은근히 밥 굶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스물셋에 결혼했는데 전기기술자인 남편이 일을 안 해서 배곯은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서른다섯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이제 몇 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쌍둥이 엄마가 애경유지 외판원을 하면 한 달에 40만원은 벌 수 있다고 나도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자기는 고덕시영아파트를 맡을 테니 나보고는 명일동 삼익아파트를 맡으라고 합니다. 외판이란 집집이 문을 두드리며 방문판매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외판에 자신이 없어서 한 달 동안을 밤새워 고민했습니다. 오늘 밤은 할 것 같은데 다음날 밤에 생각하면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마땅히 돈을 벌 만한 일이 없어서 눈 딱 감고 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첫 시도에 거절당하지 않고 팔리면 그 일은 성공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팔든지 마수를 해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삼익아파트 입구에 트럭에다 채소를 파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꽤 거리가 있는 그곳까지 걸어다니며 채소를 사먹었습니다. 나는 고덕동에 사는데 단골 아저씨 것을 팔아주려고 일부러 걸어서 온다고 생색냈습니다.

“비누 쪼가리 팔아 돈을 벌겠수?”

나는 난생처음 암사동에 있는 애경유지 대리점에 취직했습니다. 재정보증도 들어가고 보증금으로 20만원을 냈습니다. 장사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외판은 처음입니다. 물건은 물비누와 섬유유연제, 락스 등 많은 품목이 있었습니다. 처음 출근한 날 점장님이 내가 생전 처음 외판을 해본다고 삼익아파트 현장을 보고 간다며 따라와줬습니다. 기사는 무조건 아파트 안으로 쑥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마수할 사람이 있으니 채소장사 아저씨 앞에서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물건은 작은 손수레로 하나 됐습니다. 채소장사 아저씨에게 “저 오늘부터 애경유지 외판을 해요. 아저씨가 마수를 해주시면 장사가 잘될 것 같은데…” 하니, 채소장사 아저씨는 “당연히 팔아드려야지요” 하고 이것저것 많이 팔아줬습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잘될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남의 집 벨을 누르는 것이 무슨 죄라도 저지르는 듯해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애경유지요~” 하며 한 열 집 벨을 눌렀을 때 한 집이 문을 열어주면서 물비누 한 병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외상으로 주고 월말에 돈 받으러 오라는데, 외상장부를 적는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수첩에 볼펜으로 글씨를 쓰지 못하고 점만 찍어댔습니다. 민망스러워서 적은 척하고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서 마음을 진정하고 나서야 외상장부를 적을 수 있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차가 와서 안 팔린 물건을 싣고 가고 거기서 바로 퇴근할 수 있습니다. 다음날 출근하는 것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돌아서지 않고 밀고 가는 것이 내 신조였기에 씩씩한 척 출근했습니다.

아파트 벨을 띵똥띵똥 눌러 “애경유지입니다~” “애경유지입니다~” 하며 한참을 돌아다녔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락스 하나를 사면서 “몇 살이유?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돈이 될 만한 일을 해야지, 이런 비누 쪼가리 팔아 돈을 벌겠수?” 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외상이 아니고 현찰을 내서 다행이었습니다.

어렵게만 생각되던 일도 한 열흘쯤 지나니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속을 뒤집어놓는 사람도 많지만 하다보니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하루는 돌잔치 하는 집 앞을 지나가는데 “애경유지 아줌마, 식사하고 가세요” 하고 불러들였습니다. 멋쩍어서 안 들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집 할머니가 반가워하며 한 상 차려줬습니다. 자기도 젊었을 때 화장품 외판원을 해서 아들딸 공부시켰다고 했습니다. 힘내라고 물건을 며느리도 사주고 자신이 가져갈 것도 사서 매상을 많이 올려줬습니다.

도둑 오해받고 펑펑 울기도

일이 좀 익숙해질 무렵 주위를 둘러보니, 같은 외판을 해도 수입이 좋은 품목이 있었습니다. 신데라빵은 제과점급 빵인데 가정에 배달해주고 있었습니다. 슈퍼에서 파는 봉지빵보다 맛이 좋아 인기가 많았습니다. 나도 어떻게든 수입이 더 많은 신데라빵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꾸만 들떠서 애경유지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습니다. 한 집에 문이 열려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서 “계세요, 계세요~” 하고 불렀습니다. 한참 있다가 젊은 여자가 머리에 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욕실에서 나와 누가 우리 집에 들어오라고 했냐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문이 열려 있기에 들어왔다고 해도 뭐 내가 무슨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소리쳤습니다. 평생을 대문이고 안방문이고 활짝 열어놓고 살아왔던 나는 문간에 조금 들어섰다고 소리치는 서울 사람이 야박하고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파트 벤치에서 양산을 눌러쓰고 울다 울다 회사에 전화해서 물건을 반납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잘하는데 왜 그만두느냐고 아쉬워했습니다. 보증금은 한 달 뒤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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