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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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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물리치료, 나는 몸살

사원들과 함께 난곡의 계곡 식당에 놀러간 기나긴 하루
등록 2022-06-07 09:29 수정 2022-07-26 04:15
1997년 경기도 양주의 유원지를 찾은 가족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97년 경기도 양주의 유원지를 찾은 가족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

1980년대 말, 주방기구 판매에 뛰어들어 첫 번째 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매출 마감을 끝낸 어느 화창한 봄날입니다. 회사에서 조회가 끝나고 서로들 눈을 끔적하면서 동시에 몰려나갑니다. 나보고도 어서 따라오라고 눈을 끔적해서 따라나섰습니다. 한 사람만 자기 차로 뒤따라오고 모두 다 봉고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어디론가 갑니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서울 관악구 난곡 계곡으로 놀러 간다고 합니다. 웬 횡재냐 싶었습니다. 나는 잠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상상하며 행복해졌습니다. 각종 나물이 무성하고 맑은 물이 쏴~아아 소리 내며 흐르는 계곡을 상상만 해도 벌써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계곡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이 가물어서 실개울이 흘렀습니다.

웅덩이 속 술병, 가재는 어디 없나

짠짠, 짜자자잔 짠짠~ 하는 음악 소리가 골짜기를 뒤덮었습니다. 실개울은 음악 소리에 묻혀 숨죽여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곁에서 귀를 기울여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골짜기에는 물이 좋은 물웅덩이 옆으로 천막을 치고 각종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은 산골짜기도 시골과 다르다는 걸 그날 처음 보았습니다.

골짜기에 울려퍼지는 음악의 근원지는 사교댄스장이었습니다. 터 좋은 나무그늘 밑에 높고 넓고 시원스럽게 지은 들마루 위에서 사교댄스가 한창입니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가 흰색 양복을 입고 흰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늘 말없이 씩 웃으며 무슨 일이든 도맡아 하고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던 미스터 박이 “야~ 아아, 늙은 제비 춤 한번 잘 추네~” 했습니다. 갑자기 빵 터졌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허허허 골짜기가 떠나가도록 한바탕 웃었습니다. “에~에에~ 머리가 허예서 그렇지 젊은 사람이구먼. 젊은 사람이 흰머리 염색을 했나.” “아니여, 잘 봐봐. 할아버지가 맞아.” 이 사람 저 사람 한마디씩 하며 웃음이 그칠 줄 몰랐습니다.

어제 박 팀장이 돌아본 결과 보신탕집 자리가 제일 좋아서 보신탕집을 하루 통째로 빌렸답니다. 대부분이 보신탕이 좋다고 박수를 쳤습니다. 보신탕을 못 먹는 사람은 삼계탕으로 맞췄습니다. 우리가 맡은 들마루는 반 나무그늘에 천막을 쳤습니다. 작은 폭포가 흘러 고이는 물웅덩이에 수박 등 과일과 반찬을 담가놓은 시원한 자리입니다. 웅덩이 속 맥주캔과 술병을 보고는 너무들 좋아했습니다. 나는 가자마자 도랑에 가재가 있나 없나 궁금했습니다.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도랑을 뒤져봤습니다. 큰 돌을 들추고 아래를 샅샅이 봐도 가재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편을 갈라 고스톱을 친답니다. “전 여사, 개인행동 하지 말고 어서 와~” 했습니다. 고스톱을 칠 줄 모른다고 하니 나보고는 ‘고리를 뜯으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계산해서 뜯으랍니다. 고리를 어떻게 뜯는지도 모르고 고리라는 말도 처음 들어봅니다. 시키는 대로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들 신이 나서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화투장을 팔에 힘줘 내려칩니다. 사람들이 무슨 화투도 칠 줄 모르냐고 하니 이런 자리에선 아주 민망스럽습니다.

고스톱 무르익자 눈들이 빛나기 시작

우리 집안에는 아주 말썽쟁이 노름꾼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름꾼 하나 때문에 늘 집안이 시끌시끌했습니다. 노름꾼이 재산을 다 말아먹고도 미안함도 없고 뻔뻔스럽게 남 탓을 하는 것이 아주 몸서리가 났습니다. 우리 집에는 그 사람 외에 아무도 화투장을 만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명절 때 이모 따라 놀러 갔다가 민화투라는 걸 한번 해봤습니다. 이모 친구들도 뭐 그리 재미있는지 밤새워 화투놀이를 했습니다.

‘고도리’라는 것은 같은 화투놀이기는 한데 점수 계산법과 규칙이 달랐습니다. 용어도 ‘똥쌌어’ 하거나 ‘쌍피에 따닥에 광을 판다’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팔다리, 허리가 아파서 죽겠다고 끙끙 앓으며 갔던 강사들은 고스톱판이 무르익자 눈들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연신 고도리~ 홍단이야~ 하며 화투장을 야무지게 내리치고 화통하게 웃습니다. 쑤시고 아픈 덴 물리치료가 제일이야, 역시 물리치료엔 고스톱이 제일이야 하며 좋아들 합니다.

시간이 흐르자 누구는 피박을 썼다고 화냅니다. 누구를 흑싸리 껍데기로 아느냐고 얼굴을 붉히기도 합니다. 나는 그냥 앉아 있으니 자기네가 고도리 하면서 판이 끝날 때마다 내 앞에 돈을 쌓아놓았습니다. 나는 그 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설마 나에게 그냥 가지라는 돈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자꾸 물어보기도 민망했습니다.

아무튼 다들 엄청 재미있어합니다. 나는 앉아 있기가 좀이 쑤셔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그들이 웃으면 억지로 같이 웃었습니다. 늘 바빠서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가는데 점심나절이 왜 이리 긴지 하루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벌떡 일어서서 내려오고 싶은 것을 참고 참았더니 점심때가 됐습니다. 보신탕집 아주머니는 보신탕을 끓이느라 고군분투했습니다. 누린내가 많이 났습니다. 개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은 무슨 개고기를 먹느냐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본격적으로 보신탕을 만드는 시간이 되자 화투를 치던 강사들은 보신탕 끓이는 법을 배운다고 주인아주머니한테로 몰려갔습니다. 내 앞에 수북이 쌓였던 돈이 점심값으로 쓰였습니다. 아무리 보신탕이 먹음직해 보여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아주 따라나서지 않으리

점심이 끝났으니 내려가는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웬걸, 고스톱판을 다시 차리고 앉았습니다. 다들 물리치료를 더 하고 가야 한답니다. 자기 차를 따로 가지고 갔던 한 팀장이 자기는 약속이 있어 내려가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점심값 대신 음료수를 몇 병 사서 주고 내려왔습니다. 한 팀장은 “전 여사, 다음에는 아주 따라나서지 마” 했습니다. 같이 놀지 못하는 자리는 아주 고역이라 자기도 영 안 맞는다고 했습니다. 나도 물리치료는커녕 몸을 배배 꼬다 몸살이 날 것 같은 하루였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을 찾습니다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은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문방구에서 방판(방문판매)까지,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게 두려웠던 새댁이 사람들 앞에서 요리를 시연하고 명함을 돌리며 소개를 통해 냄비를 파는 세일즈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칼럼입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은 적 없고,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여러 팔 것을 바꿔가며 하루의 휴일도 없이 집안을 건사해간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절대적 노동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딸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바랍니다. 간략한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겨레21>은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모아서, 20세기 여성 노동을 재구성할 예정입니다. 전자우편 anyone@hani.co.kr로 보내주세요. 2022년 8월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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