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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서울로 올 적에 다시는 남편과 동업은 안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내가 남편을 끌어들여 동업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같이 일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출근했다가 특별한 일이 없는 날, 일주일에 두어 번 같이 만나 점심을 먹고 각자 헤어져 일하러 갔습니다.
남편은 아침이면 차 트렁크에 생수통과 휴대용 가스레인지, 김치와 라면, 쌀을 늘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거래처 사람을 만날 때 가까운 이면 함께 계곡 같은 데서 가볍게 라면 같은 것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계곡에서 취사를 금지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서로 바쁘니까 일부러 만나 놀러 다닐 수는 없고 잠시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까운 곳에서 라면이라도 같이 끓여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떤 때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실에서 유람선을 타고 뚝섬까지 갔다 오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한 편 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가끔 시내로 나갈 때는 워커힐호텔 쪽으로 아차산을 넘어 가주기도 하고, 어딘가 산속으로 들어가 아직 서울에 남아 있던 시골 같은 마을에 데려다주기도 했습니다.
좀 걱정 없이 사는가 했는데 남편이 어느 날인가 자기는 목사가 돼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가족의 만류도 소용없이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가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공부도 하고 사업도 그대로 충분히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갔지만, 하던 사업이 점점 기울더니 급기야는 사업을 접고 말았습니다. 아들과 큰딸이 대학생이니, 별 재주도 없는 내가 자연히 가장 노릇을 떠맡았습니다.
이래저래 남한테 돈을 빌렸습니다. 갚겠다고 약속한 때는 다가오는데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한창 고민할 때 한 강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한 강사님은 실라간 회사에서 만난 베테랑 선배인데 조건 없이 나한테 무척 잘해주는 분이었습니다. “전 강사 요즘 잘 있어?” 하며 물어왔습니다. “요즘 잘 못 지내요. 우리 집에 대학생이 세 명이잖아요. 지난번 학비를 빌려 냈더니 갚을 길이 없네요.” “그래, 많이 힘들겠다. 힘내. 나도 어떻게 하면 좋겠나 연구해볼게” 했습니다. 며칠 있다가 한 강사님한테서 좋은 생각이 났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로 옮겨오라고 했습니다. 제품이 저렴하면서도 냄비 구성이 좋아 잘 팔린답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남편과 같이 파트로 오면 선금을 받게 얘기해줄게” 했습니다. 남편도 급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파트로 나와 같이 선금을 받고 한 강사님이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새 회사 출고 과장님이 실습기(요리강습에서 사용하는 요리도구들)를 받아가라 해서 창고에 갔더니 누가 쓰던 건지 오래돼서 아주 새까만 냄비를 줬습니다. 나는 사무실에서 광약을 발라가며 열심히 냄비를 닦았습니다. 팔이 아파 쩔쩔매면서 실습기를 닦는데 사장님이 지나가다가 보시고 새 냄비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새 실습기를 받아서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제천에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네 집으로 냄비를 팔러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는 자기네 닭장을 개조해 방을 만들어 열두 집이나 세주고 살았습니다. 저녁에 와서 자고 아침 일찍 강습하고 가라 했습니다. 친구 집의 밥상에 멸치가 올라왔기에 멸치 대가리를 뚝 떼서 버리고 먹었더니, 친구는 말없이 멸치 대가리를 슬며시 주워서 먹었습니다. 무슨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습 뒤 친구와 동생댁이 한 세트씩 사고, 얼마 안 있으면 시집갈 딸도 한 세트 사줬습니다. 압력솥만 사는 사람, 커터기를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사를 옮기고 처음 하는 강습에 실적이 괜찮아서 체면이 섰습니다.
계약금 잃고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선금을 받아 우선 급한 대로 빚은 갚았는데 돈 값어치만큼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남들은 다들 전화로 ‘추라이’를 하는데 남편은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으니 그나마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 누구 집사님이냐고 잘 있느냐고 하고 나면 할 말이 떨어져 전화를 끊어야 했습니다. 차마 “집사님 냄비 사라”고, “요리강습을 하게 해달라”고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아는 거래처 사람들한테도 전화하면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하루는 요리강습 뒤 커터기를 많이 팔았습니다. 계약금을 받고 차에 물건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가지고 와서 보니 계약금을 넣어둔 다이어리가 없었습니다. 차에 놓고 왔나 해서 다시 가봐도 다이어리는 없었습니다. 아마 문짝에 꽂아뒀는데 물건을 내리며 다이어리가 떨어진 걸 모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곁에 있는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못 봤다고 합니다. 아무 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은 돈도 잃어버렸지만 계약 사항이 적힌 서류도 다 잃어버려서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막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너무 미안해하니까 내가 도로 미안해서 그래도 많은 돈이 아니고 계약금만 잃어버려서 다행이라고 위로해줬습니다.
남편과 나는 동갑인데 남편은 어른 같고 나는 철없는 아이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무엇을 해도 돈을 벌어왔습니다. 우리는 스물아홉에 시댁에서 나와 살림을 시작해 서른아홉까지는 돈을 벌어 집도 사고 땅도 샀습니다. 남편은 집도 땅도 다 내 앞으로 등기해줬습니다. 나름 능력 있다고 자부심을 갖던 남편이 무능력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래도 회사가 월요일만 출근하고 매일 출근 안 해도 물건만 팔면 되기 때문에 남편은 학교를 다니는 틈틈이 내가 강습 있을 때 운전해줬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죽을 것 같아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으로 전에 다니던 미국 제품을 파는 대리점에 들렀습니다. 점장님이 “전 강사 잘 왔다”고 무척 반겨줬습니다. 자기는 대리점을 접기로 했답니다. 냄비가 열두 세트 남았는데 대리점가로 현찰 주고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물건은 욕심나지만 현찰도 없을뿐더러 갑자기 어디에 다 팔 자신이 없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남편이 무조건 다 맡아놓으면 자기가 가지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글쎄, 하면 좋기는 한데 돈도 없고 자신이 없는데…” 했더니 자기가 책임지고 팔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허 집사에게 전화해 얘기했더니 선뜻 돈을 빌려줬습니다.
승용차 트렁크에 냄비세트를 싣고 뒷좌석에도 싣고 운전석 옆에도 실었습니다. 남편은 물건을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강습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자기 거래처에 전화해서 아홉 세트를 현찰로 팔았습니다. 세 세트는 강습해 팔아 회사에 선금 받은 것을 갚았습니다. 남편은 그길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세일즈우먼의 기쁨과 슬픔’은 19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문방구에서 방판(방문판매)까지,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 게 두려웠던 새댁이 사람들 앞에서 요리를 시연하고 명함을 돌리며 소개를 통해 냄비를 파는 세일즈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은 칼럼입니다. 산업역군으로 칭송받은 적 없고,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은 아니었지만, 여러 팔 것을 바꿔가며 하루의 휴일도 없이 집안을 건사해간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절대적 노동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딸들의 적극적인 제보를 바랍니다. 간략한 내용과 함께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한겨레21>은 세일즈우먼의 이야기를 모아서, 20세기 여성 노동을 재구성할 예정입니다. 전자우편 anyone@hani.co.kr로 보내주세요. 2022년 8월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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