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나는 서울 북쪽 옥류동에 살았다. 서울의 북쪽은 사대부로서 세거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청풍계에 세거한 (장동) 김씨, 자하동에 세거한 (의령) 남씨, 옥류동에 세거한 (기계) 유씨가 가장 오래됐다.”
조선 후기 영·정조 시기에 형조참의를 지낸 유한준(1732~1811)은 문집 <자저>에 서울에 세거하던 집안들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 이 세 동네가 현재의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지명이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풍계는 현재의 서울 종로구 청운동 남쪽, 자하동(백운동)은 청운동 북쪽, 옥류동은 옥인동을 말한다. 조선의 청풍계와 자하동(백운동)은 합해져 현재 청운동이 됐고, 옥류동은 인왕동(수성동)과 합해져 옥인동이 됐다.
사라진 지명 ‘옥류동·청풍계·자하동’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보자. 조선 때 사용된 옥류동이나 청풍계, 자하동이란 지명이 옥인동이나 청운동 대신 지금도 그대로 쓰였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굳이 옥류동이나 청풍계나 자하동이 어디에 있었는지 사전에서 찾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들 지명은 조선 건국과 한양 천도 이후 500년 이상 쓰였고, 옛 기록과 문학작품에도 수없이 나온다. 남아 있었다면 조선 시대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유서 깊은 지명들이 다 고쳐지고 사라졌을까? 답은 일제가 시행한 대규모 행정구역 개편과 지명 변경에 있다. 일제는 1914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모두 폐지했고, 12개 부(시)를 설치했으며, 332개 군을 220개 군으로 통합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역사적 지명이 대부분 바뀌었다.
2019년 서울시가 윤호중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일제가 왜곡한 지명 가운데 71곳이 2003년 조사에서 확인됐고, 이 가운데 종로(鍾路→鐘路)와 만초천(←욱천=아사히카와), 인왕산(仁旺山→仁王山), 노들섬(←중지도) 등 4곳은 바로잡혔다. 그러나 나머지 67곳은 여전하다. 서울시는 2003년 조사를 바탕으로 2009년 <서울지명사전>까지 펴냈지만, 더는 지명 개정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현재 피카디리극장이 있는 종로3가 주변 돈의동은 고려 때부터 한양의 중심지였고, 향교가 있었다. 따라서 조선 때 지명은 ‘향교동’(교동)이나 ‘한양동’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부근에 있던 돈녕부와 어의궁을 합해 ‘돈의동’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향교동(교동)이나 한양동이란 이름을 쓸 수 있는데, 굳이 바꾼 것이다. 교동이란 지명은 근처에 있는 교동초등학교에 겨우 살아남아 있다.
일제 왜곡 지명 확인하고도 손놔
조선 때 종묘와 종묘 앞은 당연히 종묘를 말하는 ‘대묘동’ ‘묘동’이었는데, 일제는 굳이 종묘엔 훈정동(더운 우물), 종묘 앞엔 봉익동(봉황 날개)이란 이상한 이름을 붙였다. 엉뚱하게도 ‘묘동’은 피카디리극장과 단성사 사잇길에 옮겨놓았다. 또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이 있는 운니동은 이곳에 있던 ‘운현’(구름재)과 ‘니동’(진골)을 합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냥 운현동이나 니동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뜻이 통하지 않게 운니동으로 고쳤다. 현재 인사동 지역은 조선 때 ‘대사동’(큰절골), ‘사동’이었는데, 주변의 관인방과 합해 인사동이란 이름을 붙였다. 종로구 동숭동은 조선 때 우리말로 ‘잣골’, 한자로 ‘백동’(柏洞)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숭교방 동쪽’이란 뜻의 무성의한 이름으로 바꿨다.
중구 중림동은 약초가 많은 고개라고 해서 ‘약고개’ ‘약현’이라 불렸다. 하지만 일제가 근처 지명인 약전중동과 한림동을 합해 중림동이라고 고쳤다. 약현이란 지명은 한국 최초의 고딕 성당인 ‘약현성당’에서 살아남았다. 중구 방산동의 이름은 조선 후기 청계천의 준설토를 쌓아 만들었다고 해서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었다. 일제는 이곳을 뜬금없이 ‘방산’(芳山)이라 불렀다.
2019년 윤호중 의원실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토지리정보원은 2016~2019년 일제가 왜곡한 것으로 의심되는 전국 지명 739개를 확보했다. 그러나 국토지리정보원이나 상위 부처인 국토교통부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어떤 지명 개정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일제의 지명 왜곡은 정부가 파악한 것보다 그 규모가 훨씬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종근 연구위원이 2010년 발표한 ‘식민도시 경성의 이중도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논문을 보면, 일본 거류민단이 1910년까지 서울에 붙인 일본식 지명만 114개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일본식 지명 95개와 조선식 지명 91개가 더해졌다. 조선식 지명 91개 가운데 67개(74%)도 기존 지명을 변형하거나 새로 만든 것이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충무로는 혼마치(본정), 명동은 메이지초(명치정), 예장동은 와이조다이(왜성대), 을지로입구는 고가네마치(황금정), 소공동은 하세가와마치(장곡천정)였다. 1936년엔 ‘정’(町)이란 일본식 표현이 서울의 모든 ‘동’을 대체했다. 또 모든 조선의 거리 이름은 ‘통’(通)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조선의 육조거리, 육조 앞은 광화문통이 됐고, 운종가는 종로통이 됐다.
일제는 조선 지명을 표준화하면서 과거에 널리 쓰이던 지명을 한꺼번에 몰아냈다. 조선 시대엔 대부분 ‘삼각산’으로 썼던 ‘북한산’이 대표 사례다. 또 서울 내사산 가운데 ‘백악’은 ‘북악’으로, 낙타산(타락산)은 ‘낙산’으로, ‘무악’은 ‘안산’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인왕산은 소리는 바뀌지 않았으나, ‘왕’의 한자가 바뀌었다. 돈의문의 속명이던 ‘새문’(신문)은 ‘서대문’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지명이 아니라, 지명의 범위를 바꾼 경우도 있었다. 조선의 용산은 원래 만리재에서 효창공원과 용산성당을 거쳐 청암동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조선의 용산방 지역도 이 산줄기의 동서인 현재의 원효로, 청파로 일대와 마포대로 일대를 아울렀다. 그러나 일제가 용산방 옆 둔지방 일대에 115만 평(약 380만㎡) 규모의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그 옆에 용산역을 세우자 이곳은 ‘신용산’이 됐다. 원래의 용산은 ‘구용산’이 됐다. 그러면서 용산이란 지명의 중심은 구용산에서 신용산으로 점차 옮겨갔다.
해방 뒤 정부가 같은 잘못 반복하기도
이런 잘못된 지명을 일제만 붙인 것은 아니었다. 해방 뒤 대한민국도 잘못을 반복했다. 대표적 지명이 ‘원효로’다. 일제는 1914년 이 길에 ‘원정통’(모토마치도리)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해방 뒤 이 이름을 바로잡으면서 이 ‘원정통’을 고려해 ‘원효로’라고 했다. 원래 이 길은 ‘용산로’ 정도가 적절했다. 원효로란 이름은 한강 다리 이름도 왜곡했다. 조선의 용산나루 부근에 놓인 다리의 이름이 원효로를 따라 ‘원효대교’가 됐다. 원효대교가 ‘용산대교’를 밀어낸 것이다.
한강대교와 한남대교의 이름도 잘못이다. 한강대교 주변의 옛 지명은 노들나루(노량진)로, 여기에 다리를 놓는다면 ‘노들대교’나 ‘노량대교’가 타당했다. 그러나 일제가 1917년 이 다리를 놓으면서 ‘한강 인도교’라는 이름을 붙였고, 1980년대 대한민국은 이를 ‘한강대교’로 고쳤다. 대신 ‘노량대교’는 올림픽대로의 노량진 구간 고가도로에 붙였다. 정작 ‘한강대교’가 돼야 했던 다리는 한남대교다. 한남대교가 놓인 한남동은 조선 때 한강방과 한강진(군부대+나루)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한남동도 일제가 한강과 남산을 합해 새로 붙인 이름이다.
이렇게 일제가 옛 지명을 왜곡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전문가 의견이 갈린다. 주성재 국가지명위원장(경희대 교수)은 “일제가 악의적으로 바꾼 것은 많이 고쳤고, 두 가지 이상 이름을 합해서 이름 붙이는 방식은 조선에도 있었다. 일제가 붙였지만, 100년 이상 써왔으므로 우리에게 기억과 애환이 있다. 현존 지명을 고치는 일은 최대한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민 의견 등 고려해 바로잡아야
그러나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제가 조선의 지명을 고친 것은 통치를 쉽게 하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방 직후에 모두 고쳤어야 하지만,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바로잡지 못했다. 특히 과거 우리가 사용해온 지명엔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역사가 잘 담겨 있다.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를 정상으로 돌리는 일이다.”
지명을 바로잡더라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종근 연구위원의 말이다. “일제가 붙인 지명에 문제가 많지만, 최근 우리가 도입한 도로명 주소도 다르지 않다. 성급하지 않게,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고 잘 준비해서 시행착오가 적게 고쳐야 한다. 전문가 의견을 들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대에 그 지명을 쓰는 사람이나 그 지역 주민의 생각을 담는 일이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다. “법정 지명을 당장 바꾸기는 쉽지 않으니 일제가 왜곡하기 전의 옛 지명을 도로명 주소나 학교, 공원 등 공공시설 이름에 살려 쓰면 좋겠다. 자꾸 쓰여야 나중에 이름을 바로잡을 때 되살릴 수 있다. 현재 번지 주소와 도로명 주소를 모두 써야 해서 불편이 큰데, 이것을 통합해가는 과정에서 옛 지명을 살리면 좋겠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서울역사박물관, ‘서촌 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 2010
김종근, ‘식민도시 경성의 이중도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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