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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팀장, 이서희 작가를 아는가?” 대표가 물었다. “혹시 저자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 SNS에서 꽤 유명하세요.” 대답하니 대표는 반색하며 “잘됐네. 신문에 ‘유혹의 학교’라고 연재 시작한다는데 만나보겠나? 출간할 생각도 있는 듯.” 나름의 고급 정보를 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평소 눈여겨본 저자인데다 기획안과 저자 섭외 과정을 뛰어넘고 계약에 이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수월한 작업인가. 이서희 작가는 책도 책이지만 소셜네트워크에서 꽤 유명했다. 솔직하고 탐미적이면서 매혹적인 문체로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는 ‘핫’한 페이스북 스타. 그 작가의 글이 신문에 실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혹’이란 주제로.
2014년 가을, 드디어 1회 원고가 실렸다. 온종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연재가 시작되기도 전에 출간 계약을 했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제발 저에게 축복을… 널리 읽히게 하소서.” 종교도 없으면서 기도를 퍼부었다. 하나님은 사이비 신자의 기도를 들어줄 리 없다. 좋다, 나쁘다, 파격이다, H신문에 실릴 만한 글이 아니다, 다음 글이 기대된다 등 반응이 설왕설래로 뜨거웠다. 내가 이 원고를 계약한 편집자임을 아는 사람은 “반응이 갈리던데, 괜찮겠어?”라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반응해야만 했다. 대표가 슬며시 건네준 정보를 냉큼 받은 것도 나요, 저자에게 계약하자 한 것도 나요, 책을 사고 싶게 잘 만들겠노라 큰소리친 것도 나였으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원고에 대한 반응은 여전히 양단으로 나뉘었고, 결국 10개월 21회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큰일이었다. 21회 원고 분량으로 어떻게 책을 만든단 말인가! 기획안과 저자 섭외 과정을 뛰어넘어 좋아했건만, 더 큰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다른 연재처를 찾아볼까, 추가 집필을 요청할까 고심하다 우선 그동안 기고한 글과 페이스북에 써둔 원고를 모아보기로 했다. 무려 A4용지로 300여 장, 상상 이상의 글이 쏟아져나왔다. 소재는 풍성했고, 문체는 아름다웠고,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리베카 솔닛은 “글이 내 안에서 도는 피라면,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 박동하는 심장이다”라고 했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만 의미를 지닌다. 사고 싶은 책으로 만들겠다는 그때의 다짐을 상기하며 나만의 편집 철칙을 만들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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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기획 방향을 세우고 궁극의 주제에 맞게 차례를 구성할 것. 둘째, 연재 원고는 반드시 수정 집필해 완성도를 높일 것. 셋째, 새 원고를 추가해 개연성 있게 전개하고 설득력·신선함을 줄 것. 넷째, 연재 때와 다른 느낌의 일러스트를 의뢰할 것. 다섯째, 표지 디자인은 30대 여성 취향에 맞출 것. 여섯째, 시간에 쫓겨 후다닥 마무리하지 않을 것.
다행히 저자의 의욕도 충만했다. 유혹을, 상대의 매력은 물론 자신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수업으로, 삶과 함께 단련된 소통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가는 과정으로 원고의 완성도를 높였다. 연재 때 함께한 일러스트레이터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일러스트를 선보였으며, 디자이너는 트레이싱지(반투명지)에 과감하게 붉은색과 보라색을 입혀 표지에 새로움을 더했다. 즉, 기획 의도에 부합하는 원고이자 일러스트였고 표지 디자인이었다. 문제는 3개월이면 될 줄 알았던 작업이 무려 11개월이나 걸렸다는 사실…. 쉽게 기획편집을 해보려던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격이었다. 연재 원고 편집이 수월하다는 말, 이제는 취소해야겠다. 그 뒤로 난 이서희 작가와 두 권의 책을 더 계약했고, 그중 한 권인 을 2019년 여름에 출간했다. 전작보다 글은 더 유려해졌고 책 꼴은 더 아름다워졌다. 함께 읽어보시라.
글·그림 오혜영 출판 편집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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