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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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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을 살아가는 김지영들에게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다룬 영화 <82년생 김지영>
등록 2019-10-30 17:10 수정 2020-05-03 04:29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훌쩍였다.

영화 (12세 관람가) 개봉 첫날인 10월23일 오전, 서울의 한 영화관. 평일 조조 시간대 혼자 온 관객들이 띄엄띄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다수 관객은 여성이었다. 이 영화는 누적 판매 120만 부를 돌파하며 화제를 모은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30대 주부 김지영(정유미)의 이야기를 담았다. 원작은 2016년 페미니즘 열풍과 맞물려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화화가 결정됐을 당시 캐스팅 기사에 악플이 달리고, 개봉 전부터 평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반대로 영화를 향한 응원도 많았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를 보면, 개봉 첫날 13만8970명 관객을 동원하며 전체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악플·별점 테러, 영화 상영 전부터 수난

스크린에서 만난 ‘김지영’은 화장기 없고 짧은 웨이브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여리지만 어딘가 강단 있어 보이는 배우 정유미가 김지영을 연기했다. 영화 초반, 집안일을 마치고 아이를 돌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김지영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육아로 인해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거.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근데 가끔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저 벽 너머에 출구가 있을 것 같아서 벽을 돌아가보면 또 벽이고, 좀더 돌아가보면 또 벽이고. 처음부터 출구는 없었던 것 같아요.”

김지영의 삶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일상적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을 들여다보게 한다. 김지영은 어려서부터 “여자들은 조신하게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 말을 듣고 자랐다. 남학생에게 성추행당할 뻔했지만 아버지에게 “옷을 단정히 입고 다니라”는 꾸짖음을 들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다과나 음료 준비를 여직원들에게 맡기는 현실을 목도했다. “일을 잘한다”고 인정을 받아도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핵심 부서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혼한 뒤 시가 부엌일은 그와 시어머니인 여자들 몫이었다. 일을 다시 시작하는 그를 위해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시어머니에게 전하자 “남편 앞길 막는 며느리”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지영은 아무런 대응을 못했다. 대신 회사 선배가 그에게 말한다. “지영아 불공평하지 않니? 너도 니 남편만큼 공부도 하고 사회생활도 했는데. 임신은 어쩔 수 없다고 해. 육아는 (남편과) 나눌 수 있는 거 아냐.”

원작과 달리 주변인 이야기에도 시선을

고정된 성역할을 벗어나 성평등한 문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다양한 통계 수치는 한국 사회 평범한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과 어려움이 여전하다는 걸 증명한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지난 7월 발표한 ‘2019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지난해 경력단절 여성은 184만7천 명으로 1년 전보다 1만6천 명(0.8%) 늘었다. 그 사유는 결혼(34.3%), 육아(33.5%), 임신·출산(24.1%) 등으로 집계됐다. 사회활동을 하려는 여성들은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경력단절로 인한 재취업의 어려움 등 여러 난관에 부딪힌다.

묵묵히 딸로,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살던 그는 마음에 병이 든다. “옛날 생각 많이 나고 해 질 무렵이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고 한다. 병든 마음으로 인해 가끔씩 다른 사람이 된다. 빙의 증상이 나타난다. 대학 선배, 외할머니, 친정어머니 목소리로 말한다. 줄곧 말을 삼키던 그는 명절에 시가에 내려가 혼자 설거지를 하다가 시가 식구들에게 “사부인, 쉬게 해주고 싶으면 집에 보내주세요. 딸 보니 반가우시죠.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마치 친정어머니가 된 것처럼.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난 대학 동아리 선배의 목소리로 남편에게 “지영이 지금 많이 힘들 때니 잘한다, 고생한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라”고 당부한다. 남편 앞에서 줄곧 괜찮다고 말하던 그는 사실 괜찮지 않았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김지영뿐 아니라 친정어머니, 남편, 언니, 회사 동료 등 주변 인물의 시선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특히 남편 대현(공유)이 겪는 갈등을 세밀하게 그린다. 육아휴직을 내고 싶지만 승진 등 불이익을 받는 회사 분위기 때문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하는 걸 눈치 봐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배우 정유미가 30대 주부 김지영을 연기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배우 정유미가 30대 주부 김지영을 연기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얌전히 있지 마, 막 나대”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김지영의 보편적인 일상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 공감은 누군가와 연결되는 시작점이다. 책 에서도 원작 에 대해 “우리 시대의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자신과 다른 문제적 개인의 삶을 읽고 싶어 하기보다는 이제껏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 ‘자기의 삶’을 읽고 싶어 한다”며 “이 소설을 둘러싼 ‘공감의 연대’란 구체적으로 ‘당사자성의 각성 및 획득에 의한 연대’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온 이라면 누구나 김지영의 이야기에 ‘공감의 퍼즐’ 하나 이상은 찾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내 누이 이야기, 내 엄마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은 올해 사회의 중요한 이슈인 불평등에 대해 생각하게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가부장제 안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아내, 엄마의 시선으로 가족 내 성역할 불평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점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라는 얘기다.

영화는 김지영 곁에서 그를 응원하는 연대의 목소리에도 방점을 찍는다. 오남매 중 공부를 가장 잘했지만 오빠들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던 친정어머니 미숙(김미경)은 남편이 딸 지영에게 “시집이나 가라”고 말하자 발끈한다. 지영에게 “얌전히 있지 마, 막 나대”라고도 이야기한다. 빙의 증상을 보이는 아픈 딸에게 “너 하고 싶은 것 해라”라며 엄마처럼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권한다.

침묵하던 김지영은 영화 후반부 자신의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에는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다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팔자 좋다”는 행인들의 비난을 듣고도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자신에게 “맘충” 소리를 하는 이들에게 “당신이 날 아냐고? 내가 왜 벌레냐”고 따져묻는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왜 남에게 상처 주지 못해 안달이냐”고. 이번에는 다른 사람으로 빙의되지 않은 오롯한 ‘김지영의 목소리’다.

영화 내내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보던 김지영은 후반부에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이제 괜찮아진 것일까.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10월14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김도영 감독은 “2019년을 살아가는 김지영들에게 ‘괜찮다. 더 좋아질 거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며 “앞으로 상업영화를 통해 더 멋진 ‘지영이들’의 서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렇게 스크린 속 김지영은 현실의 김지영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서 겪는 부당함을 표현할 언어를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이 혐오와 차별이 극심해지는 2019년, 다시 ‘김지영’을 호명하는 이유가 될 테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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