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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로마법에 비추어보면

<라틴어 수업> 한동일의 <로마법 수업>
등록 2019-10-11 11:05 수정 2020-05-03 04:29

의 한동일 작가가 이번엔 ‘주 전공’ 로마법을 들고나왔다. 2017년 대표적 베스트셀러인 이 그랬듯, 고전의 지혜를 구하는 독자에게 (문학동네 펴냄)은 채 20~30분도 들이기 전에 벌써 알맞은 문장을 만나게 한다. 라틴어와 로마법이라는 ‘너무 먼’ 주제가 한동일이라는 드문 작가를 통해 오늘날에도 재차 타당성을 얻는다.

그는 라틴어에 능한 가톨릭 사제이자 동아시아 출신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로타 로마나) 소속 변호사다.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겨우 5~6%인 사법연수원 과정을 두 번 유급하며 5년 만에 마치고 로타 로마나 700년 역사상 930번째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려면 로마법을 자유자재로 풀어 쓸 수 있어야 한단다. 외우고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법률가로서 자기 관점과 표현을 거느려야 한다는 뜻이다.

법은 충돌과 불화의 역사를 반영한다. 그중 “절충과 조율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고대 로마문명의 법을 읽는 일은 “복잡다단한 사회문제를 응시하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반영해가며 원칙을 세운 과정을 고스란히 반추”하는 방법이기에 지금도 울림이 크다. 이 책은 우리 시대를 꿰뚫는 주제를 큰 줄기 삼아 법에서 절충과 조율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권과 책임, 돈과 계급, 결혼과 독신, 낙태(임신 중지), 페미니즘 등의 쟁점을 로마법에 비추어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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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층(노예가 아닌 시민)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로마법은 어떻게 처벌했을까. 먼저 자유를 박탈했다. 일상생활을 마비시키는 수화불통(水火不通)에 처했다. 사실상 ‘추방’이자 ‘사형’ 선고였다. 공동체에 불법적으로 돌아올 경우 누구나 그를 살해해도 되었다. 로마 밖 외딴섬이나 사막으로 추방하는 강제유배도 있었다. 이 처분을 받으면 전 재산이 몰수되고, 공동체에서 영구적으로 고립되었다.

구체적인 죄목을 보자. “재판관이 사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금전을 수수하고 판결을 조작하는 경우, 그리고 성욕이나 연정을 일으키는 사랑의 묘약이나 낙태약을 제공하거나 사용한 경우.”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법 농단, 또 ‘버닝썬’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로마법은 법관이 판결을 조작하거나 여성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하는 것은 반성을 촉구하거나 죄의 경중을 따지기 힘든 극악한 범죄로 치부했으며, 이것이 로마의 정의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낙태약 사용, 즉 낙태를 유발하는 행위는 범죄였지만, 고전기에 낙태는 비윤리적이긴 해도 위법한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로마인은 “여성이 자식을 떼어버리는 순간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으며, 출생 전 태아는 모태의 일부일 뿐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생아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로마인에게 인간의 탄생은 생물학적 현상 이상이었다. 낙태가 윤리적, 법적으로 문제시된 건 스토아철학과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이후다. 작가는 ‘인간 한동일’의 의견이라는 전제로 절충의 길을 제시한다. “가장 약한 생명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 생명을 잉태한 그보다 조금 더 강하지만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한 생명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수 있길 기다립니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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