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었고, 햇살 좋은 토요일 오후였다. 인천 부평구청 옆 신트리공원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박노해에 앞서 노동시집 (1984)를 펴낸 박영근 시인이 머리를 식힐 겸 자주 거닐었다던 곳이다. 시인은 가고 없지만 거기 시비 하나를 세워 해마다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시비에는 안치환이 불러 유명해진 노래 의 원작시인 ‘백제6-솔아 푸른 솔아’를 새겨놓았다.
시비를 남몰래 돌보던 사람박영근 시인 13주기 추모제 및 제5회 박영근작품상 시상식, 그날 행사의 제목이다. 주인공은 고 박영근 시인과 작품상 수상자 조성웅 시인이었지만, 뜻밖의 손님이 발걸음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여든이 넘은 박진수 화백이었다. 신트리공원 근처에 화실이 있다고 했다.
박진수 화백을 소개하려면 이효정 여사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내가 이효정이라는 이름을 만난 건 안재성이 쓴 를 읽으면서였다. 이효정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노동운동을 하다 1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한국전쟁 때 남편은 월북하고 이효정은 좌익으로 몰려 수시로 사찰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그 이효정 여사의 아들이 박진수 화백이다.
행사 중에 앞으로 모셔서 인사말을 청했다. 박진수 화백 역시 신트리공원이 자신의 산책로라 했다. 산책 중에 시비가 세워진 걸 보았고, 시비에 적힌 시를 천천히 읽어보았단다. 시 내용이 자기 삶과 겹쳐 보이더라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산책할 때마다 시비 주변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면서 시비를 돌보았다고 했다.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 사람들도 1년에 한두 차례밖에 찾아보지 못하는데, 뜻밖의 시비 관리인(?)을 만난 기쁨이 컸다.
“내 어머니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고, 아버지는 조선공산당 당원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세상에 발 디딜 데가….”
느릿한 말투였지만 이런저런 소회를 전해주던 노화백은 거기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고는 눈가를 훔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참석자들 역시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침묵에 잠겨야 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박진수를 또래들은 빨갱이 새끼라고 불렀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박 화백에게도 늘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요시찰 명단에서 빠진 건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가던 박 화백은 육십이 되자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에 매달려보고 싶었다. 운영하던 주물공장을 접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고통받는 존재를 만날 때마다…”행사 뒤 박 화백의 그림이 담긴 작은 책자를 얻어 볼 수 있었다. 2018년 5월 참여연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할 때 만든 것인 듯했다. 폐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끄는 할머니를 표현한 그림에서 강렬한 붓놀림이 느껴졌다. 박 화백은 고통받는 개체나 존재를 만날 때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샛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추모제 행사를 마무리할 때마다 함께 부르던 노랫말이 가슴 깊숙이 꽂혀드는 날이었다.
박일환 시인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 나비’ 김흥국, 무면허 운전 벌금 100만원…음주·뺑소니 전력
[속보] 검찰, 윤석열 구속 연장 재신청…“보완수사권 당연히 인정”
귀국한 전광훈 “체포하려면 한번 해봐라…특임전도사 잘 몰라”
검찰, 윤석열 구속기간 연장 재신청…“가능하나 결과 장담 못해”
서울중앙지법,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수사 계속할 이유 없어”
법조계,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 “굉장히 이례적” “이해 안돼”
법원,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검찰, 26일 내 기소할 듯
[속보] 서부지법 방화 시도 ‘투블럭남’ 10대였다…구속 기로
인천공항 ‘비상’, 폭설 때보다 혼잡…공항공사 “출국까지 3~4시간”
검찰, 윤석열 구속연장 불허에 당혹…연장 재신청·기소 모두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