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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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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외롭고 따뜻한 온기

류승희 만화 <그녀들의 방>
등록 2019-05-15 13:00 수정 2020-05-03 04:29

평생 반지하 월세방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여자 네 명. 이혼한 지 한참 지나서도 1년에 여덟 번 돌아오는 남편 조상들의 제사를 꼬박꼬박 치르는 엄마. 5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큰딸(진영), 아르바이트하며 틈틈이 만화를 그리는 둘째 딸(선영),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는 셋째 딸(미영). 딸들 이름에 ‘미스코리아 진선미’의 꿈을 담은 아버지의 작명과 달리, 가족의 생활은 남루하기 그지없다.

플라스틱 빗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는 빗살을 본드로 붙이다 만성 두통에 시달리고, 진영은 굴러다니는 10원짜리 동전을 그러모아 불룩해진 지갑을 갖고 다니며, 선영은 학교 급식비가 내기 어려워 쩔쩔맨다. 미영은 ‘변태’가 드나드는 허술한 자취방에서 지옥 같은 여름밤을 보낸다.

2013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 수상 작가인 류승희씨가 펴낸 (보리 펴냄)은 이 서글픈 공동체를 연필의 부드러운 선과 여운 가득한 대사로 따뜻하게 표현해냈다.

고통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엄마를 지켜보며 딸은 ‘호수’를 떠올린다. “엄마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물속에 어떤 걸 던져넣어도 잠깐 파문만 일 뿐 이내 고요해진다.” 반지하 집과 지상 골목길을 연결하는 계단을 보며 진영은 속삭인다. “저 여덟 계단 올라가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 이러다 그냥 알바생으로 주저앉는 건 아닐까 불안한 선영은 중얼거린다. “계속 똑같은 원을 그리고 있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거라고 착각하는 걸까?”

네 명 모두 낮고 작아서 외롭고 슬프지만, 함께 견디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서로의 불안을 눈치채면서도 티 내지 않고, 무심한 척하면서 슬그머니 도와주고, 유난 떨지 않으면서 위로한다. 시련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지만, 딸들은 로맨스 소설을 도서관에서 빌리는 엄마를 보고 웃으며, 동생은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언니를 불러내 뒷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한다. 햇볕 안 드는 방엔 곰팡이가 필지언정 온기가 식는 법이 없다.

지은이는 대학 졸업 뒤 알바를 하면서 ‘멈춰버린 시간’을 살았던 자신의 막막했던 경험을 이 작품에 담아냈다. 나이 들고 아이를 낳고 살다가 문득 그 방황의 계절에 불었던 차가운 바람을 떠올렸다고 한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그 시절. 하지만 지은이는 이 가난한 모녀들을 통해 험난한 세상에서 한발한발 내딛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대학 입학도 꿈꾸지 못했던 고3 선영이가 무작정 휘두르는 배드민턴 라켓 너머로 바라보던 파란 하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15년 동안 다니던 공장에서 잘린 엄마를 위로하는 조팝나무의 푸른 기운, 바스락거리며 풀 죽은 수험생의 발을 간지럽히는 낙엽들. 작가는 독자에게 이런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우린 여전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힘겹게 걷는다. 하지만 잠깐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딘가에서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는 반짝임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그 작은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차가운 계절을 걷는 누군가에게도 이 ‘작은 반짝임’을 전하고 싶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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