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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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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장에서 온 편지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남자의 서점,

윈난 리장 ‘명이서점’
등록 2019-02-23 14:09 수정 2020-05-03 04:29
명이서점 2층 게스트하우스에서 책을 읽는 닝용.

명이서점 2층 게스트하우스에서 책을 읽는 닝용.

“나는 1969년 상하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학자 출신이고 집에 책이 많아서 아주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 부모님이 모두 국비장학생으로 외국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 나는 하루 종일 시시껄렁한 책들을 읽으며 사춘기를 보냈고 자연스럽게 학교 성적도 떨어졌지요. 나중에는 결국 쓰촨성 청두에 있는 대학교의 회계학과에 합격해 고향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989년 6·4 천안문(톈안먼) 사건의 영향으로 나는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지 못하고 청두의 한 국영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초에, 주식제가 막 시작됐어요. 가족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주식을 사기 시작했어요. 당시 쓰촨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주식을 휴지 조각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죠. 1993년 나는 주식 투자로 인생의 첫 종잣돈이라 할 수 있는 100만위안(현재 환율로 약 1억7천만원)을 손에 쥐었답니다. 나는 증권시장의 큰손 개인투자자가 되었어요. 그때가 27살이었는데, 이미 이 세계의 고수가 되었다고 느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바보같이 보였답니다.

1994년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인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한 쌍이었죠. 1998년 국유기업 개혁이 시작되자 나는 자진해서 명예퇴직을 했고 이후 전업 주식 투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2000년 11월 만삭의 아내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 7월에는 주가가 폭락했고 증권회사에서 내 계좌를 강매해버리는 바람에 나는 ‘장외인’이 되었습니다. 한순간에 그저 걸어다니는 송장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돼버렸지요.

그 뒤 나는 상처뿐인 도시 청두를 뒤로하고 유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2002년 5월 윈난성에 도착했고, 이후 지금까지 죽 이곳 리장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살던 리장 고성과 슈허마을은 갈수록 상업화돼갔습니다. 술집의 음악 소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 중턱에 있는 집 안으로까지 날아들었고, 농사짓고 말을 몰던 주변의 이웃 나시족들 역시 장사꾼으로 변해갔지요. 그래서 나는 몇 년 전 북쪽으로 더 멀리 더 조용한 바이샤마을 위쪽으로 이사 왔습니다. 이곳으로 이사한 뒤 차츰 안정을 찾았고, 나는 오랫동안 꿈꾸던 서점을 차렸습니다.

라오서가 쓴 에 보면 “나는 대청국(大清国)을 사랑하며 그것이 망할까 두렵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서점을 차린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나는 책을 사랑하는데 세상의 모든 서점이 망할까 두려웠고, 지금 서점들이 망해간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서점 이름도 명이(明夷)라고 지었어요. ‘명이’는 (주역)의 제36괘로 ‘암흑 속에서 광명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책에도 딱 들어맞는 의미지요.

만일 손님이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를 원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심지어 잠도 여기서 자도 됩니다. 만일 손님이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면 최선을 다해 대화 상대가 되도록 노력하지요. 여기서는 음료수나 간식, 문구, 여행상품 등과 같은 것은 팔지 않습니다. 앉아서 책을 읽는 손님에게는 차 한잔을 대접하거나, 어떤 때는 마당에서 자란 열매나 호두 같은 것을 내놓기도 한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리장을 선택한 이유는 이곳의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푸른 산과 맑은 물이 흐르고 한여름에도 혹서가 없고 한겨울에도 혹한이 없는 곳입니다. 생활은 단순하지만 규율이 있답니다. 나는 겨울에만 장작을 패고 말은 (기르고 싶지만) 기르지 않으며 여행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눈을 들면 설산이 보이고 따뜻한 봄에는 꽃들이 만개를 합니다. 먹고 자는 일 외에, 오전에는 주변의 들과 산을 달리고 오후에는 책을 읽으며 밤에는 인터넷을 하거나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보며 고릅니다. 지금의 내 상태는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말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희망을 잃었다고 해서 반드시 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인율 높기로 소문난 중국의 한 인터넷서점으로 어느 날 단골 고객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 남자 닝용(宁勇)의 편지는 서점 애호가들 사이에 잔잔한 화제를 몰고 왔다. 한동안 크고 작은 서점·책 관련 매체와 여행잡지에서 그 남자의 서점을 취재하러 오는 기자들이 생겼고, 그동안 손님이 거의 없던 서점 내 객잔(숙박 시설)에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도 그 편지를 읽자마자 바로 리장행 비행기를 탔던 ‘팬’ 중 한 명이다.

바로 리장행 비행기를 타다

중국 윈난성 리장에는 위룽이라는 설산이 있다. 1년 내내 녹지 않는 하얀 만년설로 뒤덮인 정상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발 5천m가 넘는 위룽설산 밑에는 이 지역 원주민인 나시족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흩어져 있고, 바이샤마을도 그중 하나다.

돌담이 빙 둘러쳐진 그 남자의 서점은 작은 객잔을 겸하고 있다. 칠순을 갓 넘긴 송마오아이(‘곰아줌마’라는 뜻으로 손님들이 붙여준 별명)가 같이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슈허에서 살 때 알던 사이로, 퇴직하고 리장에서 노년을 보내고 싶었던 송마오아이와 남자가 의기투합했다. 객잔 관리는 주로 송마오아이가 하고, 서점은 남자가 맡고 있다.

송마오아이는 구이저우성에 있는 한 지방 국유은행에서 은행장까지 한, 이른바 ‘지식 여성’ 출신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온 인생은 그리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집안 출신이 ‘반혁명분자’였던 탓에 인생길이 순탄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자신 앞에 붙은 정치적 딱지 때문에 그와 결혼할 수 없어서, 역시나 처지가 불우했던 한 평범한 철도 노동자와 결혼했다. 그 뒤 아이들을 낳고 결혼생활을 버텨왔지만 결국 이혼했다.

그 와중에 송마오아이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고등학교 은사의 권유와 도움을 받아 뒤늦게 대학에 들어갔고, 마침 개혁·개방을 맞이한 중국의 정치·경제적인 변화 덕분에 그녀의 삶도 다소 순탄해졌다. 하지만 사는 건 끊임없는 생사이별의 반복이었다.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막내아들이 하굣길에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직장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이미 아들은 싸늘한 주검이 돼 있었고, 엄마를 기다렸는지 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한다. 그 대목에서 송마오아이는 오열을 했다. 자식의 죽음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저녁이 되자 온몸에 문신을 한 꺽다리 청년 한 명이 등장했다. 막 서른을 넘긴 청년은 마오마오(‘고양이’라는 뜻)라는 예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바이샤마을 어귀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서점 내 객잔에서 장기 투숙객으로 살고 있었다. 아직까지 리장에서 자신이 만든 커피보다 더 맛 좋은 커피를 마셔보지 못했다는, 자칭 ‘커피 장인’인 고양이 청년은 문신 중독자이자 나이키 신발 광신자, 연애 중독자였다.

내부 망명자들의 유토피아

고양이 청년에게도 뜻밖의 인생 반전 스토리가 있었다. 그의 전직은 놀랍게도 치과의사다. 고향인 광시성 난닝시에서 치과대학을 나오고 한동안 치과의사를 했지만 종일 남의 냄새나는 이나 들여다보며 평생을 살아가는 일이 끔찍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서 미련 없이 때려치웠다고 한다. 그 뒤 자유로운 인생을 찾아 여기저기 배회하다 리장에 정착해서 자신의 예명을 딴 마오 카페를 열었다.

명이서점이 있는 바이샤마을에는 나시족 외에 많은 외지인들이 정착해서 객잔이나 식당, 카페 등을 운영하며 작은 부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다른 마을이나 인근 다리시 등 윈난 곳곳에는 중국 내부에서 망명 온 듯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작은 세계를 이루며 ‘망명촌’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억압적인 ‘빅브러더’가 지배하는 금전만능주의, 초현대화되고 초소비사회로 탈바꿈한 현 중국 체제와 타협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곳에선 어느 누구도 서로의 과거를 캐묻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에 사는 마흔 중반의 미혼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누구도 그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입방아를 찧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곳에서 금기시되는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도우며 살려고 한다. 그저 마음이 맞고 대화가 통하면 족하다. 여기에선 빅브러더를 찬양하거나 체제 옹호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비하는 존재로서만 삶이 인정되는 곳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인들은 한때 유행했던 대중가요 가사처럼 ‘과거를 말살당하고 오직 소비자로서만 존재가치가 있는 삶’을 강요당하고 있어요. 눈뜨면 돈 벌고, 먹고, 자고, 소비하는 존재로서의 삶만이 인정되죠. 중국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은 범죄랍니다. 하지만 중국의 비극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진정한 비극은 그 뒤에 따라올 문제들이죠. 개인으로서 나는 이런 세상에 딱히 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저항하는 방식은 그저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가 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산길을 달리는 것 외에는요. 참으로 구차하게 살고 있는 거죠.”

그 남자의 외딴 서점은 지금도 사계절 내내 꽃이 피고 만년 설산이 바다처럼 눈앞에 활짝 펼쳐진, 해발 5천m 이상의 위룽설산 아래 고요히 엎드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고 있다’.

리장(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연재를 시작하며: 중국에서 산 지도 얼추 20여 년이 됩니다. 그중 17여 년은 베이징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베이징에서 삶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한 장소에 오래 산다는 것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한편으로 권태로운 일상의 반복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지겹지 않은 것은 공기 좋고 햇살 좋은 날 오래된 베이징 후퉁(골목)을 걷는 것과 헌책과 새 책이 가득 쌓인 서점에 가는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서점에 가는 것은 늘 낯설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처럼 설레고 기대되는 일입니다.
중국 철학자 진커무는 “독서란 문자로 된 글을 읽는 행위만이 아니다. 말을 듣는 것도 일종의 독서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건 ‘사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사람을 읽는다는 것이며, 거꾸로 사람을 읽는 것도 독서의 일종이다. 사람을 읽는다는 것은 사물을 읽는 것이고 세상을 읽는 것이다”라고 독서의 범위를 폭넓게 정의했습니다. 그동안 중국 곳곳의 서점을 다니고 취재하는 일도 저에게는 일종의 ‘중국, 중국인’을 읽는 독서 행위와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연재는 중국 곳곳에 있는 다양한 서점을 통해 중국과 중국인, 중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고자 기획됐습니다. 일종의 ‘중국 읽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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