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중이다. 돈키호테처럼 한동안 거의 반미치광이 상태로 걷기에 몰두하며 세상을 떠돌고 싶었다. 기사 소설에 빠져 미치광이가 된 돈키호테는 “그동안 읽은 것을 모두 실천하며 세상 곳곳을 떠돌리라 마음먹으며… 어느 무더운 7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엉성한 투구를 뒤집어쓰고 로시난테에 올라탄 뒤… 불의와 폐단이 가득한 세상을 향해” 출정하지 않았나.
나도 어느 무더운 7월,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피땀 흘려 ‘숨겨둔’ 비상금을 찾아서 엉성하게 싼 배낭을 메고, 좌석이 텅텅 빈 최저가 비행기에 올라탄 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호기심과 미지로 가득한 길을 향해 출정했다. 로시난테와 산초 판사 같은 내 길동무는 중학생 딸과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이다.
피자와 숙제 없음에 따라온 아이들이 순진한 아이들은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피자와 햄버거·스테이크 등 평소 동경해 마지않던 ‘서양 음식’을 날마다 먹을 수 있고, 학교 방학숙제를 면제해주겠다는 교활한 엄마의 꼬임에 넘어가, 출정 첫날부터 ‘악 소리’ 나는 피레네산맥을 넘으며 생애 첫 고행을 맛보는 중이다. 지옥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은 멀쩡하던 정신도 돈키호테 옆차기할 만큼 ‘돌아버리게’ 만든다. 온몸은 이미 간장에 달달 졸여지다 못해 까맣게 타들어가는 닭볶음탕 같은 신세다.
아이들은 날마다 ‘아동학대죄로 고소하겠다’는 협박과 ‘열사병에 걸려 순교하는 우리를 길 위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다. 덧붙여서 ‘매년 이맘때 태양이 가장 악랄해질 때, 엄마는 (무덤에 묻힌) 우리를 만나러 와서 평생 이 고문 같은 순례길을 걸어야 한다’고. 불도장에 지진 것처럼 온몸의 피부 비늘이 벗겨지고, 다행히 미모가 아니라 그리 억울하지는 않지만, 중년의 얼굴이 초로의 노인처럼 변해가는 걸 보고 나서는 나도 자신을 상당히 ‘미친년’이라고 인정했다. 도대체 무슨 영광을 얻으려고 이 불구덩이 같은 길을 하루 종일 걷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은 또 무슨 죄고.
체면치레할 정도로만 적당히 걷다가 역대급 폭염으로 ‘타 죽을 것 같다’는 합리적인 핑계를 대고 그만 걸을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가족을 길에서 만났다.
집채만 한 배낭에 모든 살림살이를 다 걸머지고 걷는 그들은 영락없는 떠돌이 집시 같은 모습이었다. 긴 레게 머리를 찰랑찰랑 늘어뜨린 그는 여자친구와 개 두 마리와 함께 체코 프라하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그를 카프카로 기억하기로 했다. 딱 보기에도 가난이 몸에 밴 그들은 길 위에서 노숙을 밥 먹듯 하고, 잠깐 쉬어가는 마을 카페에서도 늘 가장 싼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만 마셨다. 며칠 동안 계속 같은 길을 걸으면서, 그들이 카페에서 음식을 사먹는 걸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목적지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 입구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있을 때도 종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걸어왔던 그들은 1유로짜리 맥주 한 잔(작은 컵)씩만 시켜 마셨다. 주인들을 닮아 순둥순둥한 개들도 그늘 밑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아무 욕망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산토도밍고를 출발해 벨로라도로 가는 길에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작은 성당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몇 가구가 모인 작은 마을에서 비도 피할 겸 잠시 쉬었다. 개를 몹시도 사랑하는 아이들이 일부러 그들 옆에 가 앉았다. 담배를 한 개비씩 피우는 그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왜 걷니?”
“뭐 특별한 이유 없어. 한번쯤 오고 싶었던 길이었어. 여름에는 길에서 자도 안 춥고 짐도 많이 필요 없잖아. 조금 더 늙으면 걷기 싫어질 것 같아서 지금 걷는 거야. 근데 넌 아이들까지 데리고 왜 걷니?”
“나도 뭐 특별한 이유 없어. 걸으면서 생각해보려고(영어가 짧아서 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근데 넌 꿈이 뭐니?(역시 영어가 짧아서 이런 쉬운 질문밖에 할 수 없었다)”
“꿈? 그런 거 없어. 꿈은 잘 때나 꾸는 거야. 잠에서 깨면 꿈도 깨어나는 거야. 이렇게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는 게 꿈같은 일 아냐? 넌 무슨 꿈이 있어?”
“나도 없어. 오늘 자면서 꿔야지.”
한때 중국 윈난성 리장에 빠져 살았던 때가 있다. 남편과 크게 싸운 뒤 ‘이혼을 결심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숨어 있고 싶었을 때 리장으로 갔다. 그 뒤 리장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되어 1년에 한두 번씩 고향 찾듯 갔다. 리장에는 베이징보다 더 많은 다양한 내 친구들이 살고 있다. 지난해 여름에는 아이들과 한 달 동안 리장 친구 집에서 살았다. 그곳은 고원지대라 한여름에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분다.
상하이에서 알게 된 한 서점 주인이 리장에 가면 꼭 만나보라고 소개해준 사람이 있다. 그이는 리장의 슈허 고성에서 ‘돈키호테’라는 이름의 객잔을 운영하는데, 서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우리가 리장에 갔을 때 그이가 꿈꾸던 서점이 드디어 ‘그랜드 오픈’을 했다. 서점명도 객잔과 똑같이 돈키호테다. 돈키호테는 서머싯 몸의 , 카뮈의 등과 더불어 그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그이는 삶의 연륜과 달리 이제 겨우 스물아홉의, 아직은 젊은 처자다.
돈키호테 서점 주인, 왕팅이 꿈꾸는 인생은 ‘자유로운 삶’이다. 돈키호테가 늙다리 종마 로시난테를 타고 녹슨 창을 휘두르며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도 ‘자유를 위해서’라고 해석했다. 왕팅은 그 자유를 위해 고향 간쑤성에서 ‘탈출’해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숙하고 거리 행상도 했으며 옷가게도 열었다. 그러다 돈이 조금 모였을 때 리장에 카페와 객잔을 차렸다. 리장은 자신이 떠돌며 겪어본 세상의 수많은 장소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곳이라고 했다.
왕팅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간혹, 그가 그럴듯한 객잔과 카페, 서점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부모 잘 둔 덕에 젊은 나이에 고생 안 하고 산다’며 뒷말을 할 때가 가장 분하다고 한다. 돈키호테처럼 미쳐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자유와 신앙’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놀린다며.
멍훠훠는 왕팅의 서점에서 개업 이후 처음 열린, ‘독자와의 대화’를 주최한 작가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지만, 초로의 중년으로 보이는 ‘초로한’ 훠훠는 키가 190㎝ 넘는, 장대높이뛰기 선수 같은 긴 다리를 가졌다. 그 긴 다리 훠훠는 요즘 중국에서 ‘뜨는’ 작가군을 형성하는 여행작가 중 한 명이다.
중국의 1980~90년대생은 ‘집 밖’을 벗어날 수 없었거나, 벗어나는 걸 두려워했던 조부모와 부모 세대와는 달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여행 다녀온 사진들을 과시하는 것을 새로운 ‘부의 기준’으로 삼는 세대다.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문화 소비도 늘듯이, 중국도 여행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여행 잡지의 증가와 소득수준별로 특화된 여행 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여행 욕구를 대리만족시켜주는 다양한 여행작가들의 등장은 중국 출판계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다.
훠훠의 원래 직업은 사진작가이자 영화 촬영감독이다. 영화를 촬영해 번 돈으로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찍고 싶은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책을 출판한다. 지금까지 여행한 나라는 총 25개국이다. 훠훠는 여행기를 출판한 뒤, 출판사가 책을 팔아주거나 독자가 알아서 책을 사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책을 내자마자 바로 ‘북콘서트’ 투어에 나선다. 서점들과 연락해서 ‘북콘서트’ 일정을 잡고 현장에서 독자들에게 사인하며 책을 판다. 그렇게 해서 초판은 거뜬히 다 판다고 한다.
왕팅의 돈키호테 서점에서 만난 훠훠는 자기를 ‘가난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꿈을 좇아다닌다고. 25개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슨 돈이 많아서 저렇게 자유롭게 놀면서 한가롭게 돈을 버나’라고 부러워하지만 자기는 태생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자유롭고, 자유롭기 때문에 ‘한가하게’ 여행을 다니면서 돈도 벌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돈만 많은) 부자들은 절대로 내면이 자유로운 여행을 못한다고.
길 위에 서보니 세상에는 수많은 돈키호테가 있다. 개들을 데리고 순례길을 걷는 가난한 카프카 가족도 그렇고, 갓난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짐을 한 수레 밀고 다니면서 걷는 젊은 부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살아봤지만 결국엔 혼자가 되더라며 남은 생은 혼자 씩씩하게 잘 살아보기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다는 대만에서 온 중년 여인. 그리고 마오쩌둥에 패해서 장제스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대만으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정착한 중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제주도와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지금은 미국 시민이 되었다는 진유근씨. 그는 중년 나이에 문득 ‘나는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 갑자기 산티아고를 오게 되었고, 길을 걸으며 누구에게나 “저는 한국에서 온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내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돈키호테를 품고 있었다.
길 걸으면서 하는 숙제아동학대죄로 엄마를 고소하겠다고 벼르던 아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하루에 20㎞만 걸어도 ‘너무 행복하다’고 고마워한다. 다행히 순례길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독기를 내뿜던 태양도 순해지고 길도 시원해졌다. 길을 걸으면서 아이들에게 내준 이번 여름방학 숙제. “세상을 배부르게 읽어라!”
리장(중국 윈난성)=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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