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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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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과 러간의 공통점

뜨거울 때 가장 맛있지만 식어도 먹을 만하다… 우한 ‘지청고서점’
등록 2019-12-20 11:43 수정 2020-05-03 04:29
우한 ‘지청고서점’의 책 읽는 우라오반.

우한 ‘지청고서점’의 책 읽는 우라오반.

중국 우한에 가면 반드시 러간(热干面)을 먹어야 한다. 수분기 없는 마른 면에 참깨소스를 부어서 비벼 먹는 이 면은, 이름 그대로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다. 우한의 아침은 낡은 전선줄처럼 이리저리 어지럽게 얽힌 작고 비좁은 골목길과 도로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러간의 열기와 함께 시작된다. 중국어로 아침을 먹는다는 말은 ‘츠짜오판’(吃早饭)이지만, 우한에서는 ‘궈짜오’(过早)라고 한다. 우한 사람들은 궈짜오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하루를 잘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른 아침, 우한 거리에는 러간으로 궈짜오를 하는 사람들의 ‘후루룩 쩝쩝’ 소리가 자동차 소리보다 더 요란하다.

‘大’를 쓰는 유일한 도시, 동방의 시카고 우한

다른 지방 국수들에 비해 별 특색이 없는 러간멘은 어찌 보면 중국 후베이성 성도인 우한의 특징을 닮았다. 바로 ‘특색 없는 특색’이다. 후난, 쓰촨 등 개성이 뚜렷한 지방과 다르게 우한으로 대표되는 후베이성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도시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개성이 없는 도시라고 악평한다. 중국 유명 역사학자 이중톈은 우한의 이런 무미건조한 특색을 ‘집대성’이라는 다소 긍정적인 단어로 묘사했다. 연결된 다른 지방의 문화가 응축된 곳이 우한이고, 우한은 이 다양한 문화가 집대성된 곳이라는 것이다.

우한은 도시 중심으로 중국의 젖줄이라는 창장강이 흐르고, 수륙으로 사통팔달로 연결돼 있다. 우한이란 이름은 우창과 한커우, 한양 세 지역을 합친 것이다. 우한을 중심으로 쓰촨과 산시, 허난, 후난, 구이저우, 장시, 안후이, 장쑤 그리고 후베이, 아홉 개 성이 연결돼 있다. 중국에서 상하이를 제외하고 ‘큰 대’(大)자를 쓰는 유일한 도시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에선 ‘대상하이’ ‘대우한’이란 말이 보편적으로 쓰였다. 한때 ‘동방의 시카고’라는 별칭으로도 불렀다. 하지만 우한의 현재는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유리한 지리적 여건과 풍부한 자원이 있음에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특색 있는’ 발전을 하지 못했다.

우한에서 가장 발전한 특징이라고 하면 첫째는 궈짜오 문화고, 둘째는 성질 사납고 우악스럽다고 ‘악명 높은’ 여인들이다. 우한 여인들의 성격을 보편적으로 묘사할 때 중국에선 흔히 ‘포라’(泼辣)라는 표현을 쓴다. ‘성질이 사납고 우악스럽다, 무지막지하다’라는 뜻인데, ‘대담하고 억척스럽다’는 뜻도 담겼다.

우한에서 유명한 소상품 도매시장인 한정제(汉正街)에 가보면 왜 우한 여자들을 ‘포라’라고 하는지 대충 이해된다. 가격 협상이 잘되지 않거나, 물건을 건드리기만 하고 사지 않는 손님과 말다툼이라도 벌어지면 시장 안은 순식간에 욕지거리가 난무한다. 방금 전까지 생긋 웃던 주인 여자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듣보잡’ 같은 욕이 따발총처럼 ‘따발따발’ 쏟아지는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한다. 그 욕을 다 먹으면, 아침에 먹었던 러간이 입에서 뿜어져나올 지경이다.

인생은 낑낑대며 밀고 살아가는 일

2012년 개봉한 영화 (万箭穿心)는 우한을 배경으로 했다. 중국 영화사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속물스러우면서도 억척스러운 보통 사람들의 삶과, ‘포라’한 우한 여자들의 성격을 잘 묘사했다. 주인공 리바오리는 전형적인 우한 여자다. 푼돈에도 체면과 품위를 생각하지 않고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아내에게서 온갖 멸시를 받으며, 사는 게 ‘개보다 더 불쌍한’ 남편 마쉐우는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고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아들을 위해 가정은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은 리바오리는 곧장 경찰서에 전화해 ‘매춘’이라고 밀고한다. 우연히 아내의 밀고 사실을 알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까지 당한 마쉐우는 유서 한 장을 남긴 채 창장대교 아래로 투신한다. 리바오리의 절친은 이 모든 일이 새로 이사한 집의 풍수가 좋지 않아서라고 분석한다. “아파트 밑으로 너무 많은 교차로가 관통하고 있어. 풍수지리학적으로 말하면, 만 개의 화살이 심장을 관통하는 격이라고.” 리바오리는 이 말을 듣고 발끈한다. “그놈은 쓸모없는 남자야. 만일 해고당한 사람들이 모두 강물에 투신자살한다면, 창장강이 다 막혀버릴 거야. 지금 나는 아들과 시어머니를 부양해야 해. 나는 이 집에서 반드시 눈부신 삶을 살아낼 거야.”

리바오리는 시장 골목에서 나무 멜대를 지고 짐꾼 노동자를 하며 어린 아들과 시어머니를 부양해간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눈부신 삶’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는 설날에 장성한 아들에게 절연을 통보받은 뒤 홀로 창장대교로 간다. 여차하면 남편처럼 강으로 투신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과 아들 또래의 젊은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웃음을 보인다. 낡은 자동차를 낑낑대며 밀고 가는 리바오리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은 제 힘만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래도 억척스럽게 낑낑대며 밀고 살아가는 일’이라고.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 하나. 영화 초반에 마쉐우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전거 바구니에서 도시락을 꺼내서 먹기 시작한다. 그들이 먹는 것은 바로 러간이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러간을 먹으며 신호등을 기다리는 우한 사람들의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던지. 또 시장 한가운데서 러간을 먹으며 두리번두리번 손님을 기다리는 리바오리의 표정은 얼마나 절박하던지. 그들이 먹는 러간은 자신의 삶이자, 살아가야 할 인생을 상징하는 듯했다. 러간은 뜨거울 때 가장 맛있지만 식어도 먹을 만하듯이, 인생도 뜨겁든 차갑든 살기면 하면 그럭저럭 견뎌지는 것이라고.

중국 우한의 러간

중국 우한의 러간

우한대학의 제5도서관

우한에 도착한 다음날, 나도 출근하는 사람들 무리에 섞여 노천식당에서 러간한 그릇으로 ‘궈짜오’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우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황허러우에 갔다. 황허러우를 내려오니 땀이 온몸을 적셨다. 7월 중순이라 한낮의 우한은 살인도 부를 수 있는 ‘열가마’ 자체다.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우한대학 앞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가 슬쩍 나를 곁눈질하면서 던지는 농담.

“우한에 놀러 오셨나봐요?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방금 전에 아프리카 유학생이 탔거든요. 유학생이 타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더워죽겠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웃긴 이야기가 뭐냐면요, 우한에 와서 황허러우를 비싼 표값 주고 보러 가는 사람들이에요. 아니, 옛날 그대로의 건물도 아니고 몇 년 전에 불이 나서 재건한 건데 무슨 대단한 볼거리가 있다고 돈 주고 힘들게 올라간데요?”

졸지에 ‘멍청한’ 관광객이 된 나는 그 기사 이야기를 ‘멍청하게’ 듣고 ‘멍청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그 기사가 나를 다른 승객에게 ‘우한대학 구경하러 가는 멍청한 관광객’이라고 웃음거리 삼을까봐 일부러 골목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목적지인 고서점 앞에 도착해서야 택시기사는 내가 ‘멍청한 관광객’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나를 ‘문화인’(배운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우한의 세 번째 특징은 바로 이 고서점이다. 중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문대인 우한대학 앞에 있는 작은 골목길에 숨은 고서점은 우한에서 좀 ‘배운 사람’이라면 다 안다. 우한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이 서점을 우한대학의 ‘제5도서관’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대학 도서관 못지않게 장서가 많다는 뜻이다.

‘지청고서점’(集成古書店)이란 이름을 가진 이 고서점은 올해 31년째 문을 열고 있다. 우한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이 ‘우라오반’(吴老板·우 사장)이라고 부르는 지청고서점의 우헝시 사장은 올해 73살이다. 그는 우한의 유명한 고서점 거리에서 자란 덕에 어릴 때부터 고서적에 관심이 많았고, 커서 자신의 고서점을 차리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여러 정치운동의 풍파 속에 원치 않는 고초를 겪었고 ‘산다는 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인생의 평지풍파는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1980년대가 되면서 조금씩 풀렸다. 1980년대 들어 정부 차원에서 문화사업 지원을 시작하자, 드디어 자신의 오랜 꿈인 고서점을 차리게 되었다. 1988년 동생과 함께 차린 고서점은 한때 장서가 10만 권 이상이었다. 하지만 2014~2015년 두 차례 홍수로 절반 이상의 고서적이 물에 잠기고 살아남은 장서는 4만여 권. 우라오반은 그때 일을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한다. 고서적을 찾는 사람은 대부분 장서가와 애서가, 대학교수, 학생이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주문할지 훤히 파악이 된다고 한다. 우라오반이 고서점에 품는 자부심은 전혀 근거 없는 허풍이 아니다.

‘러간’을 파는 집

‘러간’을 파는 집

한국에도 이런 고서점이 있어?

지청고서점은 중국 내 고서점 중에서도 ‘최고’로 통한다. 우한시 정부도 지청고서점을 문화보호 중점 서점으로 지정해 각종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있다. “내 서점을 모르는 이는 다 가짜로 공부하는 사람들이야. 내가 일주일에 월·수·금요일만 일하고 다른 요일에는 고서적을 수집하러 다녀. 1년에 한두 차례 대만이나 홍콩 등에도 가서 고서적을 수집해. 아무리 돌아다녀도 내 서점에 있는 고서적보다 더 좋은 책은 없더라고. 대만의 유명하다는 고서점도 장서 수준이 별 볼일 없어. 고서점을 운영하려면 자신이 먼저 고전에 박학다식해야 하고, 책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한대학의 그 어떤 교수가 와도 종일 논쟁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량이 많은 사람이야. 고서적을 수집하러 가지 않는 날에는 종일 하는 일이 책 읽는 거야. 그게 내 일이고 인생이지. 한국에도 이런 고서점이 있어?”

그러니 우한에 가면 반드시 세 가지를 경험해봐야 한다. 첫째는 러간을 먹고 ‘궈짜오’하는 것, 둘째는 시장에 가서 우한 여인들의 ‘포라’한 욕지거리를 들어보는 것, 셋째는 지청고서점에 가서 문 앞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서 책을 읽는 우라오반을 만나는 것이다. 우라오반은 이미 서점 입구에서 오래된 고서적처럼 의자와 함께 붙박이가 되어 있다.

우한(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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