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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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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먹는 이여, 남의 인생에 씨 뱉지 마라

세상의 모든 잡지 볼 수 있는 복합 공간, 상하이 ‘헝산·허지’
등록 2019-11-07 11:17 수정 2020-05-03 04:29
중국의 전설적 배우 롼링위도 설리와 같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삶의 끈을 놓은 이유도 설리와 비슷하게 익명의 타인들이 내던진 ‘아픈 말’들 때문 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중국의 전설적 배우 롼링위도 설리와 같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삶의 끈을 놓은 이유도 설리와 비슷하게 익명의 타인들이 내던진 ‘아픈 말’들 때문 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그 남자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활짝 퍼졌던 햇살이 점점 서늘한 바람을 머금고 서쪽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던 늦은 오후. 나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구르몽의 시를 노래처럼 흥얼거리며, 마침 보기 좋게 가을색이 입혀진 집 근처 공원을 산책 중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원 안을 몇 바퀴 돌다가 그만 ‘집에 갈까’ 하며 잠시 벤치에 앉았다. 가는 길에 달달한 가을무 한 개 사서 고춧가루와 액젓, 매실청 등을 듬뿍 넣고 마지막으로 와인 한 잔 부어서 완성하는, 나만의 가을 ‘와인 깍두기’를 담그리라 결심했다. 거기에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노란 가을배추 속잎을 몇 장 떼어 밀가루 반죽에 묻혀 지져내는 달큰한 배추부침개도 만들리라고. 막걸리 한 사발에 배추부침개 한 입, ‘와인 깍두기’ 한 개 아삭거리면 이 깊어가는 가을에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 시몬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할 것 같았다.

올해 최고 중국 수박왕, 아냐?

입맛을 다시며 일어서려던 순간, 내 앞을 달려가는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 보니 많이 낯익은 얼굴이다. 내 기억이 아직 노쇠해지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요즘 중국에서 최고의 화제인 ‘바로 그 남자’다. 몇 달 전에도 나는 그가 이 공원 근처를 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는 ‘참 괜찮은 사업가’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한때 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도 몹시 탐냈던, 중국 최대 인터넷서점 겸 종합 인터넷쇼핑몰인 당당왕(當當網)의 공동창업자 리궈칭이다. 파란색 바람막이 점퍼와 아래위로 검정 운동복을 입고 달리던 그는, 족히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공원에서 뜬금없이 그와 마주친 뒤, 나는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휴대전화로 리궈칭의 블로그와 관련 기사를 검색했다. 요즘 중국 소셜네트워크 세상에서 리궈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향해 총질하는 ‘포스팅’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없다. 이 부부는 자신들의 인터넷 블로그에 상대방의 온갖 ‘상상 이상의’ 사생활을 폭로하며 서로에게 ‘죽어라’ 총질하고 있다.

리궈칭의 부인은 유명한 중국 여성 사업가로 손꼽히는 위위다. 이름만 들어도 부러움과 질투가 솟구쳤던 이 부부는 최근 중국인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수박왕’(瓜王)이 되었다. 나도 얼마 전 내 명의의 중국 소셜네트워크 게시판에 그들 부부 이야기를 ‘올해 최고 중국 수박왕 부부’라고 포스팅했다.

중국 인터넷 유행어 중에 ‘츠과췬중’(吃瓜群众)이 있다. 여기서 ‘과’(瓜)는 해바라기씨나 수박 등을 말한다. 츠과췬중은 ‘수박이나 해바라기씨 등을 까먹으며 (어떤 사건을) 구경하는 관중’이란 뜻이다. 중국 검색 사이트 ‘바이두’의 해설에 따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세한 상황이나 내막을 몰라서 침묵하거나, 사건에 대한 견해가 있어도 침묵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우리나라 인터넷 용어로 ‘눈팅족’ ‘팝콘족’ 정도 된다. 주로 연예인 등 유명인들의 사생활이나 스캔들을 인터넷에서 ‘구경’하면서 제멋대로 입방아를 찧는 이들을 가리킨다. 최근에는 인터넷 공간에서 사건의 진위와 상관없이 함부로 악성 댓글을 달며 희희낙락하는 악플러 등을 포괄해 지칭하기도 한다.

루쉰 “롼링위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

가수 설리가 자살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중학생 딸은 “이게 다 엄마 같은 ‘수박 먹는 관중들’ 때문”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다. 타인의 삶과 취향을 함부로 욕하고 평가하고 조롱하며, (나처럼 무관심한 체하면서 몰래) 구경하는 수많은 ‘수박 먹는 관중’이 설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나는 생전의 설리는 잘 모르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의 자살은 상당 부분 누리꾼들의 ‘악플’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삶의 중심으로 들어서려던 나이, 25살. 설리는 익명의 낯선 타인들이 함부로 내던진 비수 같은 말(言)들에 찔려 죽은 것이다.

1920~30년대 중국 무성영화 시대에 최고의 배우로 활동했고, 지금까지도 중국 영화사에서 중요한 100명의 배우로 기억되는, 전설의 배우 롼링위도 설리와 같은 나이인 25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짧은 생을 영화처럼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롼링위가 삶의 끈을 놓은 것도 설리와 비슷하게 익명의 타인들이 내던진 ‘아픈 말’들 때문이다. 그녀의 유서에는 ‘남들의 말이 무섭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자신의 사생활을 둘러싸고 곳곳에서 입방아를 찧는 타인들의 비방과, 풍선처럼 둥둥 떠돌아다니는 온갖 소문들,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롼링위의 자살은 당시 중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불러왔다. 루쉰은 그녀의 죽음이 ‘사회적 타살’이라며 중국인들 사이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구경꾼’(圍觀) 심리를 비판했다. 구경꾼 심리가 바로 ‘수박 먹는 관중’의 심리다.

인쇄술 발달로 종이책이 대중화된 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책’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잡지’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의 보편적인 잡지는 대개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지극히 통속적이고 잡스러운 수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수다의 대부분은 유명인들의 스캔들이나 라이프스타일 등에 관한 이런저런 입방아로 채워져 있다. 아무리 교양 있는 상류층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통속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 또 누구나 은밀하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대부분의 잡지는 그런 인간의 통속 심리를 대리만족시켜주는 역할을 해왔고, 유명한 타인들에 대한 건전한 수다보다는 가십과 조롱을 일삼아왔다.

그러나 문명이 진화하듯이 잡지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이제는 세속적인 욕망만을 취급하는 잡지는 ‘황색잡지’로 간주돼, 혼자 몰래 읽어야 한다. ‘타인들에 대한 수다’도 여러 형태로 세련된, 심지어 지적이기까지 한 교양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잡지의 역사는 인간 욕망의 진화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2018년 3주년 기념 행사 포스터가 걸린 상하이 헝산·허지 서점(왼쪽). 다양한 방식으로 상하이 시민들에게 ‘복합 문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현숙

2018년 3주년 기념 행사 포스터가 걸린 상하이 헝산·허지 서점(왼쪽). 다양한 방식으로 상하이 시민들에게 ‘복합 문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현숙

가십 없는 잡지의 진화를 보고 싶다면

상하이 헝산루에 가면 바로 이러한 잡지의 역사, 세상의 모든 잡지를 볼 수 있는 서점이 있다. ‘잡지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헝산·허지’(衡山·合集)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서점은 ‘복합 공간’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름 그대로 층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서점을 가장 좋아한다.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서점이 있다면 나는 평생 그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종일 이 서점에 있어도 절대 지루하거나 하품이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볼거리와 읽을거리가 골고루 잘 배치돼 있다. 엄선된 라이프스타일이 구비돼 있다.

서점은 총 3층으로 돼 있다. 1층은 주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로 구성됐고, 간단한 먹거리와 커피 등 음료수를 파는 카페가 있다. 2층은 영화·예술·사진 등 영상 관련 서적과 작은 전시 공간이 있다. 분기별로 다른 전시가 열린다. 전시 분야는 문학,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각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사이에도 다양한 사진과 영상작품이 아기자기하게 전시돼 있다. 3층은 전세계에서 출판되는 잡지로 채워져 있다. 그곳을 보면 ‘잡지 박물관’이라는 별칭이 절대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그 서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도 바로 3층 잡지 공간이다.

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라고 했지만, 이곳에 와보면 잡지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이 확 뒤집힌다. 누가 잡지를 ‘타인들에 관한 잡스럽고 상스러운 수다’라고 했는가. 그런 잡지도 있지만 아닌 잡지가 더 많다. 이곳에 있는 잡지들은 전세계에서 출판되는 각 분야 전문지로, 대부분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담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잡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잡지는 그 안에 우리 내면을 발효시키는 ‘인생에 대한 태도’를 담고 있었다. 내가 닮고 싶고, 살고 싶어 하는 타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잡지도 있었다. 그 잡지는 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백만 가지 삶의 방법이 있고,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으면 된다”고.

서로 다른 시대와 나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같은 나이, 비슷한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롼링위와 설리도 어쩌면 이 잡지의 표지 인물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세상에 존재하는 백만 종류의 삶에서 한 방식이고, 우리는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읽으며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다.

타인의 삶을 모욕하지 말자

그러니 ‘수박 먹는 관중’이여, 당신들도 인터넷 세계에서 타인들의 삶을 샅샅이 검색하고 퍼나르며 조롱하는 ‘엿 같은’ 인생을 살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부터 검색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오늘도 혹시 늦은 오후 내내 공원을 달리고 있을지 모르는 남자여, 당신도 이제 그만 아내를 향한 찌질한 전쟁을 중단하고 그대만의 또 다른 인생길을 달려가시라.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막걸릿잔 속에서 목메 울고,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될 날이 오겠지만, 그렇다 해도 결코 타인의 삶을 모욕하고 조롱하지는 말자. 나는 ‘와인 깍두기’가 익어가길 기다리며 ‘헝산·허지’에서 사들고 온 ‘인생 잡지’들을 사부작사부작 읽어야겠다.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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