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5급 판정을 받고 전화로 소식을 전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주 평범한 이 말이 아직까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별 뜻 없는 의례적인 인사말일 수도, 그저 그날 하루 신체검사 받느라 수고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태어나서 그날까지 고생 많았다는 의미로 들렸다. 마치 군대 면제를 위해 20년간 불편한 몸으로 지냈고 드디어 합격(?) 소식을 받았구나, 너를 그렇게 낳아 미안하지만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니 정말 다행이다 하는 느낌이었다. 너무 오버 아닌가 싶지만, 실제 그날 받은 이 느낌은 당시 이 말을 듣던 공중전화 박스 안의 정경과 함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나는 태어날 때 양손 모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제외한 가운데 세 손가락이 붙어 있었다. 어릴 때 몇 차례 수술로 손가락 개수는 각각 다섯 개로 맞췄지만, 해당 손가락의 마디는 평범한 사람에 비해 한두 개씩 부족하다. 특히 오른손 검지나 중지, 약지로는 방아쇠를 당기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신검 때 양손 엑스레이를 한 번 찍는 것으로 쉽게(?) 5급 판정이 나왔다. 펜을 잡고 글을 쓰거나 젓가락질을 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등 일상생활에서는 별 불편함이 없다. 그저 총 쏘기에 적합하지 않게 태어났을 뿐.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은 개인적으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개운치 않은 기분도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현재의 병역제도 대신 성별이나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각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공동체를 위한 복무를 할 수 있는 제도가 도입되면 좋겠다. 군대에 적합한 사람은 군대에서 사회복무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에 맞게 각종 공공시설에서 일정 기간 일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군가산점 문제로 남녀가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나 같은 사람도 굳이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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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정말 운이 좋은 경우다. ‘총을 쏘기에 적합하지 않음’이 신체적으로 드러나 큰 갈등 없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전쟁없는세상 엮음, 포도밭출판사 펴냄)에서 만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총을 쏘기에 적합하지 않음’이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드러났다는 차이만으로 감옥에 가야 했다. 군대냐 감옥이냐 하는 갈림길 앞에서 그들이 했을 고민의 흔적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들은 공동체를 위한 복무를 회피하기는커녕 더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다만 총을 쏘고 전쟁을 준비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로 복무하고 싶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53인의 소견서’를 담은 이 책을 통해 내가 경험한 어떤 문제를 나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훨씬 높은 강도로 고민한 이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어쩌면 그들 덕에 내가 가끔 상상만 했던 그 제도가 도입될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복무제도의 도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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