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극의 대가’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엔 삼대가 모여 산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을 소유한 조부모, 은퇴 뒤 건강한 노후 생활을 하는 부모, 전문직인 자식 세대. 이런 청·중·노년 가족 구성은 외부 위협에도 끄떡없는 완전한 공동체처럼 보인다. 그런데 설정을 조금만 바꾸면 어떨까. 집이 있긴커녕 월세 내는 것도 빠듯한 조부모, 간병이 필요한 부모,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자녀. 빈곤 앞에서도 가족이 안전한 울타리가 될까.
(NHK 스페셜 제작팀 지음, 홍성민 옮김, 동녘 펴냄)이 펼쳐내는 얘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독거노인의 고립된 삶을 취재하던 NHK 스페셜 제작진은 지금까지의 통념을 뒤엎는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다. 자녀는 부모의 장수를 마냥 기뻐하지 않고, 가족은 노후의 안전망이 아닌 생존의 위협 요소가 돼버렸다.
여든 살 요시아키는 삿포로의 저소득자 대상 시영주택에서 손자와 살고 있다. 그의 한 달 수입은 연금 95만원. 생활보호대상자라 뇌경색 의료비와 집세 20만원은 면제받았다. 실직한 아들이 찾아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정규직을 구하지 못한 45살 아들은 지게차를 운전하며 일당을 받는다. 아들의 수입이 불안정한데도 요시아키는 생활보호대상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요시아키는 한 달째 혈압약을 먹지 못했고, 가족은 1100원짜리 식빵 여섯 조각을 나눠먹는 상황을 감내한다.
거동이 불편한 요시아키에게 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큰 의지가 된다. 그러나 생활은 더 곤궁해졌다. “아들이 없으면 다시 생활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지요.”
일을 그만두고 병든 노모를 돌보다 급사한 다케시, 비정규직 아들딸이 자립하지 못해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일하는 요시하루 등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은 가혹한 존재다. 서로에게 짐이 돼 힘들게 사는 가족 이야기는 외면하고 싶은 불행한 시나리오다.
워킹푸어(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 무연(無緣)사회(가족 등 전통적 사회안전망이 붕괴된 사회), 독거노인 등 현대 일본 사회가 겪는 여러 문제를 통해 취약한 사회보장 문제를 지적해온 NHK 제작진은 전작 때처럼 고령자와 자녀들의 내밀한 삶을 밀착 취재했다. 제작진이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취재하면서 관계 기관한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가족과 동거하면 지원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가족의 공멸을 막기 위해 원치 않는 분리를 당하는 상황은 모순적이다. 책은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의 한계를 고발한다.
가난 앞에서 무력한 일본 사회의 모습은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4배인데다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웃도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처럼 함께 사는 노인 부모와 성인 자녀가 생활고에 못 이겨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김수현 작가의 가족극은 드라마이지만, 책이 풀어내는 고통스러운 삼대의 삶은 한국과 일본이 공통으로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이다.
장수경 편집3팀 기자 flying710@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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