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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도시 기획자가 바라본 서울 강남 개발 40년사… <강남의 탄생> 공동저자 한종수씨
등록 2016-06-17 14:45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한국 사회에서 ‘서울 강남’은 예외적 공간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에서 강남을 “구별짓기의 아성” “욕망의 용광로”라고 표현한 바 있다. 또한 강남 지역 가운데도 격차가 있어 ‘강남 안의 강북’이 공존하는 형용모순의 공간이다. 남북 분단의 현실과 개발독재의 역사 등 ‘30년 압축 경제성장’ 과정에서 권력과 욕망이 분출됐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신도시 ‘작은 강남’ 지향

‘강남’이란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종수 세종시 도시재생센터 사업지원팀장은 “강남은 단순히 서울의 한복판에 형성된 지리적 공간으로서만 의미 있는 게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압축한 상징적 공간이자, 한국 사회의 권력과 욕망이 시작되고 끝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강남을 욕하지만, 무너져서는 안 되는 곳’이란 인식이 내재된 곳이기도 하다”라고 풀이했다. 그는 “최근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의 경우도, 다른 지역에서 생긴 일이라면 얘기가 달랐을 수 있다. 강남처럼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한 채 단순 살인사건으로 끝났거나,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의제로 번지지 못했을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종수 팀장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서 일하다가 도시 이면에 얽힌 이야기와 인연을 맺었고, 최근 강희용 한양대 겸임교수와 함께 낸 책 (미지북스 펴냄)에서 강남의 개발 역사와 정치·사회·경제적 의미를 풀어낸 바 있다.

6월7일 세종시 조치원역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국내 신도시들은 모두 ‘제2의 강남이 돼야 한다’는 욕망을 품고 설계됐다고 보면 된다. 경기도 일산·분당, 수원 영통 같은 신도시들이 하나같이 ‘강남 지향적 도시’, 혹은 ‘작은 강남’이 되려고 했다. 서울 여의도는 ‘원조 강남’, 노원과 강북은 ‘실패한 강남’, 목동과 강서는 ‘성공한 강남’으로 불리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강남’은 이름조차 없던 동네였다. 한강 이남 ‘도시’는 기차가 다니던 영등포뿐이었다. 지금의 강남이 당시에는 ‘영등포의 동쪽’이란 뜻으로 ‘영동’으로 불렸다. 마을 전체에 공중전화 한 대 없는, 시골 그 자체였다.

당시 서울 잠원동은 유명한 뽕밭이었다. 모래 토질이어서 무가 잘 자랐고, 그래서 단무지가 유명하던 동네였다. 서초동은 꽃시장이 있던 동네였다. 한 팀장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했던 미군이나 주머니 사정이 괜찮았던 서울 부자들이 서초동 꽃시장에서 꽃을 사갔다. 압구정동은 배나무가 많던 과수원골이었고, 타워팰리스가 있는 지금의 도곡동은 도라지가 잘 자라던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분단이 강남을 낳았다
우리 사회에 ‘서울 강남’은 애증의 공간이다. <강남의 탄생>공동저자 한종수 팀장은 “강남은 대한민국 그 자체다. 부와 권력의 시작과 끝, 욕망의 대상이자 분출구인 곳이 강남이다”라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우리 사회에 ‘서울 강남’은 애증의 공간이다. <강남의 탄생>공동저자 한종수 팀장은 “강남은 대한민국 그 자체다. 부와 권력의 시작과 끝, 욕망의 대상이자 분출구인 곳이 강남이다”라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강남이 지금의 위상에 오르기 시작한 게 불과 40여 년 전이다. 강남은 ‘대한민국의 축소판’답게 초고속 성장을 했다. 1967년 당시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공약으로 걸면서 강남 개발을 본격화했다. 서울의 강북과 강남을 연결할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강남고속터미널도 이 지역에 생겼다. 그리고 1975년 10월1일 서울에 강남구가 신설됐다.

“강남구가 생긴 지 한 해 만에 경기고등학교가 이전했고, 3년 뒤 이 지역을 중심으로 ‘8학군’이 탄생하면서 강남은 ‘교육의 메카’가 됐어요. 부동산 쪽에선 ‘가진 자들의 아이콘’으로 비유됐던 은마아파트(1979년)를 비롯해 대한주택공사가 강남과 잠실·반포에 잇따라 고급 아파트 단지를 쏟아냈죠. 대중문화가 시대의 흐름을 먼저 읽었어요. 1980년엔 강남에 불었던 ‘부동산 광풍’ 문제를 꼬집은 영화 이 개봉했고, 1982년 가수 윤수일의 노래 가 발표됐습니다. 그리고 불과 20년 뒤인 2000년에 이곳은 타워팰리스로 상징되는 ‘초고가 부동산 도시’가 됐습니다.”

많은 개발 후보 지역들을 제치고 ‘강남’이 서울 개발의 핵으로 부상한 이유는 한국이 ‘분단국가’였기 때문이다. 한 팀장은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전통적인 국토 중심축인 서울∼개성∼평양을 따라 지금의 은평과 경기도 고양, 파주 쪽이 집중적으로 개발됐을 것이다. 이렇게 됐다면 강남은 대단히 제한적이거나 소규모 개발에 그쳤을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휴전선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강북 지역 개발을 주저했고, 한국전쟁 때 100만여 명이 한강에 막혀 북쪽에 남겨지게 된 ‘트라우마’ 탓에 개발의 축을 한강 동쪽 이남으로 옮겨왔다. 실제로 강남 개발이 진행 중이던 1968년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인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됐고, 북한 무장 게릴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높았다.

1988년 강남구 주위로 송파·서초구까지 신설되면서 ‘서울의 심장’ 강남은 체구를 키웠다. 1986년부터 올림픽대로가 들어선 뒤, 사통팔달의 도시가 됐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용인 고속도로, 분당∼수서 고속도로, 동부간선도로, 외곽순환도로 등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망을 형성했다. 문화 쪽에선 예술의전당, 롯데월드, 잠실야구장 같은 시설이 들어왔다.

1995년엔 대검찰청, 대법원, 국가정보원(당시 국가안전기획부) 같은 핵심 국가기관이 들어섰고, 2007년엔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삼성 본사가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종교계에선 삼성동 봉은사와 추정 건축비 3천억원에 이르는 ‘사랑의 교회’가 서초동에 들어섰다. 2012년 가수 싸이의 노래 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한종수 팀장은 “‘대한민국이 꿈꾸던 도시’의 축소판이 모두 강남에 아로새겨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남이 생기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일이 많았다. 강남 아파트를 지어 부자가 된 ‘아파트 기업 재벌’들이 대부분 쫄딱 망했다. 삼호건설을 시작으로 은마아파트를 지었던 한보, 한양, 진흥, 삼익, 라이프주택, 우성 등이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부동산값 상승으로 앉아서 돈을 벌었던 건설사들이 기업 체질 강화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장사로 너무 쉽게 돈을 벌었고 ‘강남 졸부’처럼 기업들이 사그라진 것이다”라고 한 팀장은 말했다. 반포 쪽에 뜨거웠던 아파트 청약 열기를 따라 ‘정관수술’의 인기가 높았던 적도 있다. 정부가 청약 열기를 인구정책에 활용하기 위해 ‘불임수술자 우선 분양 제도’를 포함시켰고, 이 때문에 반포 아파트에 입성한 이들이 ‘정관 시술 확인증’을 받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강남개발사  연표


1962년  화신 재벌 총수 박흥식 ‘남서울 계획’ 내놓음
1969년  제3한강교(한남대교) 완공
1970년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
1971년  잠실 물막이 매립공사 시작, 논현동 공무원 아파트 착공
1975년  서울 강남구 신설
1978년  8학군 탄생, 남부순환도로 완공
1979년  은마아파트 완공, 코엑스 첫 전시장 완공, 강동구 신설
1986년  올림픽대로 완공
1988년  분당신도시 건설 계획 발표
1995년  대법원, 대검찰청 서초동 이전, 국가안전기획부 내곡동 이전
2002년  타워팰리스 완공
2007년  삼성 본사 서초동 이전
2012년  가수 싸이 발표
자료: (미지북스·2016)


강남 개발 건설사 대부분 망해

1994년 10월21일 아침 7시40분,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시내버스 등 차량 6대가 다리 상판과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무학여중·고 여학생 9명을 포함해 32명이 숨졌다. 이듬해 6월29일 오후 5시55분에는 당시 국내 단일 매장으로 최대 규모였던 서초동 삼풍백화점 건물 1개 동이 무너져 502명이 사망했다. 모두 강남을 초고속 개발하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강남은 이제 지리적으로도 복합적 의미를 담은 말이 됐다. 한종수 팀장은 “먼저 서울 한강 남쪽을 ‘강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강남구 그 자체가 ‘강남’으로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2대 부촌’으로 꼽히는 강남구와 서초구를 묶어서 ‘강남’이라고도 한다. 서초·송파·강남구를 묶은 ‘강남 3구’를 일컫기도 한다. 교육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강남 3구’에 강동구를 더한 곳이 ‘강남 학군’으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강남은 대개 ‘평범한 이들이 넘보기 어려운 경계 지역’이라는 의미를 담게 됐다.

정치적으로 강남은 1980년대까지 ‘야권 성향’의 도시였다. 당시 야권 지도자인 김영삼에 대한 지지가 서울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꼽혔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새누리당 텃밭’ 구실을 했다. 최근에는 다시 진보적 투표 성향이 높아지면서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강남을 지역구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지방에서 ‘강남꼴 도시 성형’을 시도하는 도시들이 넘쳐난다. 부산·대구·광주·대전 같은 광역시들이 줄줄이 ‘제2의 강남’을 꿈꾸며 신도심을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시청·법원·방송국·터미널 같은 주요 시설들을 모조리 신도시로 옮기는 ‘강남 방식’을 끌어들였다. 한 팀장은 “강남식 도시 성형에 따른 부작용은 뚜렷하다. 구도심에는 알짜배기 시설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불가피하게 옮길 수 없는 기차역과 전통시장 같은 것만 남아 지역이 황폐화하고 있다. 그 시작이 모두 강남이다”라고 말했다.

지역 특성 맞는 마을공동체 만들어질 것

‘강남’은 어두운 그림자를 지녔다. 강남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종수 팀장은 “강남 하면 주로 부정적 얘기들이 돌출되지만 긍정적 조짐도 보인다”고 했다. “강남역 인근에 예전에는 돈을 내지 않으면 앉을 공간조차 없었는데, 최근에는 길에 동그란 벤치가 생겼어요. 청담동의 고급 문화도 ‘높은 벽’을 만든다고 느낄 수 있지만, 옛날 룸살롱만 있던 시절보다 낫잖아요? 강남도 지역 특성에 걸맞은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갈 겁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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