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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판타지의 ‘태양’이었지 말입니다

신드롬 일으키며 종영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 심층분석… 재난 서사, 유시진·강모연 ‘케미’ 버무린 김은숙의 힘
등록 2016-04-21 18:30 수정 2020-05-03 04:28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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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가 애초 SBS 편성을 고려하던 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드라마 데뷔작인 을 시작으로 근래의 까지, 김은숙 작가 흥행 불패 신화의 중심에는 늘 SBS가 있었기에 신작 역시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예상돼왔다. 이 작품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KBS 편성으로 옮겨지게 된 데는 무엇보다 수백억원에 이르는 제작비를 SBS가 부담스러워해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김은숙표 멜로, 명성을 되찾다 </font></font>

하지만 또 다른 요인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김은숙 작가는 자주 ‘위기설’에 시달렸다. 그 전작들이 캐스팅에 큰 공을 들이고도 연속으로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톱스타 장동건을 12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불러들인 은 김은숙 역대 최악의 작품이라는 악평을 받았고, 한류 스타 이민호를 비롯해 박신혜·김우빈·강하늘·박형식·크리스탈 등 ‘핫’하고 젊은 스타들을 대거 기용한 에 대한 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이름값과 캐스팅의 힘으로 흥행 신화는 그럭저럭 이어갔지만 정작 중요한 작품 완성도는 점점 퇴보 중이라는 평이 대세를 이뤘다.

이런 상황에서 의 최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트렌디드라마 작가인 김은숙이 과연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는 그동안 김은숙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국내 트렌디 로맨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작품이다. 작품성 측면에서 진화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최소한 김은숙표 판타지의 저력을 새삼 재확인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김은숙 드라마는 로맨스의 정석이라 불리면서도 꾸준히 그 지평을 조금씩 확대해왔다. 등 ‘연인 삼부작’을 통해 까칠하지만 속은 순정파인 남주인공과 솔직하고 밝은 여주인공이라는 캐릭터의 전형, 그리고 이들이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삼색 로맨스를 완성한 그는 또 다른 색깔의 드라마 에서는 직업인으로서의 성장과 멜로를 조율한 직장 연애담을 성공리에 그려냈다.

‘정치 로코’를 표방한 에서도 메시지와 대중성의 조화라는 상업드라마 최대의 난제를 수준급으로 달성했다. 흔히 최고작이라 평가받는 에서는 자신의 장기인 신데렐라 판타지를 재치 있게 변주해냈다. 극 중에서 남녀 주인공의 몸이 뒤바뀌는 초현실적 설정은 단순히 코미디를 위한 도구에 그치지 않고 그런 기적 없이는 드라마에서조차 신데렐라 로맨스가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암시하며 장르적 자의식을 반영했다.

그 후속작인 과 이 실망스러운 평을 받았던 데는 이처럼 김은숙이 꾸준하게 시도해왔던 장르적 지평의 확대나 변주의 노력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은 주인공들의 연령대를 40대로 높였을 뿐 그에 걸맞은 성숙한 어른들의 로맨스를 보여주지 못했고, 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로맨스를 10대 학원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KBS 보다 나아진 점이 없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특유의 ‘오글거림’ 상쇄한 재난 멜로</font></font>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여러 장르를 결합한 최근 드라마들의 성공 공식을 모조리 조합하고 있다. 재난 서사를 주축으로 첩보액션물, 의학드라마, 멜로를 모두 소화한다.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여러 장르를 결합한 최근 드라마들의 성공 공식을 모조리 조합하고 있다. 재난 서사를 주축으로 첩보액션물, 의학드라마, 멜로를 모두 소화한다. KBS

의 폭발적 흥행에는 김은숙이 기존 성공작에서 발휘했던 장기, 즉 시대의 트렌드를 효과적으로 조합하고 새로운 판타지를 개척하는 능력을 다시금 되찾아 그 위력을 극대화한 데 원인이 있다. 근래 드라마 트렌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여러 장르적 요소를 균형 있게 결합한 복합장르적 성격인데 는 여기서 더 나아가 최근 몇 년간 흥행한 드라마들의 성공 공식을 모조리 조합하고 있다.

첫 회에 남주인공 유시진(송중기)의 화려한 액션을 이끌어낸 북한군과의 대결이나 국제 무대를 넘나드는 비밀 작전은 KBS , SBS 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격을 연상시키고, 여주인공이자 의사인 강모연(송혜교)이 ‘백’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 임용에서 탈락하는 병원 이야기는 계급 충돌의 장으로 재현되곤 하는 최신 의학드라마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축 장르인 재난 서사는 이러한 장르적 요소를 모두 담아내는 최적의 용광로로 기능한다. 전쟁·감염병·지진 등 재해의 거의 모든 형태가 총집합한 ‘우르크’는 특전사 유시진의 스펙터클한 액션 무대가 되기도 하고, 강모연의 휴먼메디컬드라마가 펼쳐지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특히 재난물은 지난 몇 년간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 등으로 우리 사회의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꾸준히 증가하는 장르 중 하나이기에 가 로맨스팬들을 넘어 좀더 폭넓은 시청층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요인이 됐다.

또 하나 인상적인 효과는 재난 서사의 무게로 인해 김은숙 드라마 특유의 ‘오글거리는’ 대사의 느끼함을 상쇄하고 멜로의 운명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르크에서 모연과 극적으로 재회한 시진이 지뢰를 농담 삼아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죽음이 일상화된 재난 지역의 현실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대위님의 농담은 누군가의 목숨이 오가고 국가가 움직이는, 그런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감추기 위함’이라는 모연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역대 김은숙 드라마 중에서 제일 많은 농담을 건네는데도 유시진 캐릭터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는 이유다. 재난의 비극은 고백의 순간에도 진정성을 배가한다. 가령 목숨을 건 주인공들이 사지로 떠나며 남기는 ‘유언 고백’은 김은숙 기존작들의 유행어록으로 회자되는 ‘내 안에 너 있다’ ‘나 너 좋아하냐?’ 같은 고백을 모조리 농담처럼 들리게 만든다.

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공동작가인 김원석의 원안 덕도 크겠지만, 그 위에 다양한 트렌드를 조합하고 멜로를 강화해 흥행 상품으로 빚어내는 건 김은숙의 오랜 장기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유시진 신드롬’이다. 사실 김은숙 로맨스의 핵심은 남주인공 캐릭터의 힘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명 ‘차도남’ ‘까도남’으로 불리는 로맨스 남주인공들의 전형적 캐릭터는 김은숙 드라마에서 완성됐다. 이러한 특징은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계급적 애티튜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신데렐라 판타지의 부산물로 인기를 끌었지만 ‘배려’와 ‘예의’를 중시하는 요즘 시대에는 개선이 필요하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유시진과 강모연의 ‘케미스트리’</font></font>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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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진의 차별적 매력이 여기에 있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일명 ‘직진 고백’은 전형적인 김은숙표 남주인공의 특성이지만, 까칠함과는 거리가 멀고 예의 바른, 시대에 맞춰 수정된 캐릭터다. 대신 그에게는 ‘신비로움’이라는 또 하나의 남주인공 트렌드가 더해진다. 에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박수하(이종석), 에서 외계인이라는 비밀을 감추고 400년간이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도민준(김수현) 등 인기 남주인공들에게서 발견되는 트렌드다.

유시진의 경우 그 신비로움은 여성들의 모험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국 로맨스 드라마에서 그리 주목하지 않았던 판타지다. 그러나 제약이 많은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에게는 분명 남자보다 한층 강렬한 모험에 대한 열망이 존재한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을 성희롱하는 이사장, 이용만 해먹는 지도교수 등에 지친 모연에게도 이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극 초반 시진을 건달로 오해한 모연이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 대 다수의 싸움을 벌이는 시진의 모습에 흥분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모험을 즐기는 성격은 암시됐다. 모연이 시진에게 진심으로 반하게 된 순간도 그가 헬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가 아닐까. 우르크에서 시진과 재회한 모연은 좀더 본격적인 모험을 떠나게 된다. 학대받는 우르크 소녀 파티마와 유시진을 구하며 뿌듯해하는 장면은 대표적 사례다.

유시진과 강모연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바쁜 의사’와 ‘빡센 군인’은 서로가 자신의 현실을 잊게 하고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이끌린다. 모연이 시진에게 처음 이별을 선언한 이유처럼 너무 다른 세계가 계속해서 사랑에 위기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 세계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그들을 함께 영웅으로 성장시킨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다 구할 순 없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걱정하는 시진에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파티마의 삶은 바뀐다. 그리고 그건 파티마에겐 세상이 바뀌는 일일 것”이라 답하는 모연의 모습은 그녀 역시 또 하나의 영웅임을 말해준다. 물론 모연 역시 뒤로 갈수록 남주인공에게 수동적으로 종속되는 김은숙 드라마 여주인공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나, 계급의 위계로 부딪히는 남녀가 아니라 서로의 가치관을 수정하고 “노력”하며 성장한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캐릭터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모든 이야기는 로맨스 판타지에 종속되리니</font></font>

김은숙 드라마의 근본적 성격은 8회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유시진과 모연의 태도에 압축돼 있다. 잔혹한 구조 현장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마음을 확인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별을 보며 “진짜 뻔뻔하네. 땅이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르고”라고 말하는 모연에게 시진은 “위로되라고 보라 한 건데…”라고 답한다. 김은숙 드라마는 바로 그 위로의 판타지에 주력한다. 에서 끊임없이 지적된 고증이나 개연성은 애초에 그의 관심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가 저 로맨스의 판타지에 종속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은숙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둘로 나뉠 것이다. 위로에 몰입하거나, 땅의 현실에 불편해하거나.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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