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수 기자
2016년 격월간지 이 발행 사반세기를 맞았다. 창간호인 1991년 11~12월호에서 김종철(69·사진) 발행인 겸 편집인은 물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을 거쳐 박근혜까지. 대통령 6명이 바뀌었지만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은 여전히 착잡하다. 1980년대 ‘가정파괴범’이라는 낱말이 신문 사회면에 출몰했다면, 지금은 ‘헬조선’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차례씩 기사에 등장하는 형편이다. 철골 구조처럼 튼튼할 줄 알았던 민주주의의 뼈대가 골수부터 썩고 있는 상황이다.
1월13일 서울 종로구 녹색평론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 발행인은 “답답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국가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묻게 만든 박근혜 정권, 4대강 사업이라는 전대미문의 ‘국책사업 사기’를 벌이고도 ‘녹색성장’이라는 거짓으로 포장한 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그는 부쩍 정치와 민주주의 문제를 파고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가 “지난해 상반기에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책만을 보았다”고 한 까닭이다. 그는 ‘공생공락’의 삶을 위해 사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생태학적 대안이 절실하다고 20년 넘게 주장했지만 세상이 타락하는 가속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발언은 지식인의 책임이자 운명절망적일지언정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하는 그가 에 쓴 글을 모은 칼럼집 (전 2권)을 펴냈다. 집필 연대순으로 묶인 책에서 첫 칼럼이 쓰인 시기가 2008년 5월이다. 공교롭게도 100호(2008년 5~6월호)를 발행한 때와 겹치고, 이명박 정부의 집권 첫해이기도 하다. 책 제목을 ‘발언’이라고 스스로 지은 이유를 그는 책머리에 이렇게 밝혔다.
“‘발언’한다는 것이 지식인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자 운명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사회 속에서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마련해준 정신적·물질적 토대 덕분에 어떻든 그럭저럭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는 나는 무엇에 관해서 어떻게 발언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발언은 무슨 사회적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김 발행인에게 민주주의는 근래 들어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그는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고 끊임없이 지적해왔다.
“한 대학에서 국제 심포지엄을 하는데 나한테 정치 분야 기조연설을 맡아달라고 한다. 주최 쪽에서 검색을 해보니까 최근 몇 년 동안 민주주의 얘기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더라. 민주주의의 퇴행이라고 요즘 말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120년 전 전봉준 장군이 잡혀가서 심문받은 기록이 있다. 전봉준의 구상은 합의제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왕조시대 한두 사람이 통치하는 것은 아무래도 오류가 많다고 본 것이다. 전봉준의 구상을 지금 우리가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사실 왕조시대보다도 못하다. 그때는 견제 세력이 얼마나 많았나. 식민지-전쟁-독재를 거치면서 오히려 역사적으로 후퇴한 것 같다.”
김 발행인이 보기에 민주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민주주의야말로 밥 먹여주는 시스템’이라는 확고한 신념이나 논리가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논할 것도 없고 더불어민주당도 지리멸렬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결국 주어져 있는 건 선거뿐이다. 선거법을 바꿔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기존 시스템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데서 참 난감하다. 4년마다 국회의원 재선만 꿈꾸는 사람들이 어떻게 장기적인 고민을 할 수 있겠나.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리더도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기까지는 솔론이나 페리클레스 같은 천재적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의 불행은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없으면 정당이나 언론, 시민단체 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다 분산돼 있으니까 참 고통스럽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는 4대강 사업 이전까지만 해도 시민운동과 지역운동으로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차원에서 정치가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용기 있게 정부와 싸우지만 어떻게 모두가 다 그렇게 할 수 있겠나. 박근혜 정부는 지방자치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 지자체가 주어진 권한으로 복지 프로그램을 하려고 해도 정부가 방해한다. 그리고 정부는 법을 무시하고 시행령으로 다 하고 있다.”
역대 정부, 철저히 농업 홀대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그동안 녹색평론사에서 저자·역자·편자로 펴낸 책들. 이들 책은 민주·생태·농업 등의 열쇳말로 묶인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때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 이야기도 나왔다. 그는 현 정부는 물론 역대 정부들이 농업과 농민을 내팽개쳐온 것을 질타했다. “서울대병원에 누워 있는 백남기 선생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역대 어느 정부도 사려 깊게 농업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현상적인 경제 성과만 생각했다. 민중궐기대회에서 (그 누구도 아닌) 늙은 농민이 희생되었다는 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은 창간 뒤 25년 동안 집요하게 농업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 발행인은 2008년 평론집 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퇴행을 우려하면서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는 개념도 소개했다. 일본의 사상가 후지타 쇼조를 인용하면서 그는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조차 이제는 불가능한 국면이라고 보았다. “(경제성장에 따라) 그동안 고르게는 안 됐지만 (떡)고물이 떨어지는 게 있었다. 결국 그게 박정희 시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연결된 거다. 앞으로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로 갈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나느냐, 아니면 계속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해 출구를 못 찾고 파쇼로 가느냐. 그 싸움이라고 본다.”
그는 경제성장이 결국 멈추는 시대로 가는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이후 몇십 년 동안은 일단 경제성장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마비시키거나 속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게 멈췄다. 역사적 문제가 무엇이고 해결해야 할 게 무언지 고민해야 한다.” ‘경제성장’이라는 허구성과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책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를 그가 2002년 번역·출간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점도 김 발행인은 강조했다. 재분배도 중요하지만 ‘사전 분배’ 또한 절박한 제도라는 설명이다. “기본소득 말고는 경제를 살릴 방법이 없다. 좌파나 우파, 복지라는 용어를 쓸 필요도 없다. 원천적으로 사람들이 돈을 가지게 해야 한다. 기본소득 주창자 중에는 신자유주의자들도 있다. 다음호부터 기본소득을 주창한 사상가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려고 한다.”
후쿠시마 사고 뒤에도 정부는 탈핵 거부김 발행인은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도 정부가 원자력 정책을 전환하지 않는 것을 거듭 비판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에 탈핵 진영 인사 2명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합리적인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이 사실상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핵마피아’들과 연관된 사람들이 식구까지 다 합치면 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2만 명의 힘이 나머지 시민 몇천만 명보다 강하다는 거다. 환경단체와 녹색당 등에서는 이미 탈핵을 위한 제도 도입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짜두고 있다. 그런데 핵마피아들은 그냥 묵살하고 힘으로 찍어누르기만 하는 상황이다. 경남 밀양도 자료를 보면 송전선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결국 애매한 시골 사람들만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기득권자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 전체를 희생시키고 있다. 그런 그들이 과연 애국 세력인가.”
이처럼 총체적인 난국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지식인의 책임이 더욱 크다고 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문제 졸속 합의 등의 사안이 불거져도 꼼짝하지 않는 일부 원로 지식인들의 행태를 그는 꼬집었다. “글 잘 쓰고 책 많이 본다고 지식인인 게 아니다. 발언할 때는 발언해야 한다. 성명서를 낼 수도 있고 정부를 준열하게 꾸짖을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지식인은 담대하고 용기 있게 발언하고 모여야 한다. 그런데 너무 분산돼 있다.”
김 발행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낱말에 ‘노예’가 있다. 그는 사람이란 자유인 아니면 노예라고 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자기통치,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법률에 자기가 복종하는 것이라고 간명히 설명했다. 그리고 직접민주주의는 안 된다고 전제하고 시작하는 현대 민주주의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녹색평론사에서 ‘래디컬 데모크라시’를 주장하는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을 여러 권 번역·출간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뷰 당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을 했다. 김 발행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보지도 않았다. 제목만 봤다. 늘 현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의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박정희는 친일파라기보다 ‘황도파’에 가깝다. 일본에서 천황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황도파 말이다. 자기가 한국의 천황이 되고 싶었던 거다. 그 딸이 박근혜 아닌가.”
인터뷰 막바지, 그는 집단지성의 절박함을 힘주어 말했다. “맨날 당위적인 얘기를 하는 게 서글프고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어떻게 하겠느냐”는 그는 모으고 모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뜻있는 사람들이 지혜를 모으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도리인 것 같다.”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 필요”영문학 전공자로서 그가 다시 문학에 깊은 눈길을 줄 수 있는 날이 올까. 여전히 불길한 전망으로 가득한 이 시대, 이 사회가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 그가 25년 전 창간사에 적은 이 문장이 이 땅에서 구현되는 날은 언제쯤 올 것인가.
“우리와 우리들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지금, 그는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와 연대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 시작은 ‘발언’하는 것이고 ‘발언’을 듣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희생시키지 않고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어떻게 벗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를 안고 이 암울한 시대를 비통한 심정으로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신적 교감의 공동체일 것이다.”( ‘책머리에’)
“도시화·산업화가 아무리 ‘문명화’의 척도라고 하더라도, 땅이 죽거나 땅과의 유대가 끊어지면 인간은 조만간 사멸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땅의 성질을 잘 알고, 땅을 사랑하며, 땅을 보살피는 데 온 생애를 바치는 소농들이야말로 생태계와 인간다운 문명의 궁극적인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땅이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
“자본주의란 가차 없는 경쟁, 이윤추구를 위한 전력 질주의 체제이다. 이 체제에 자기절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유한한 자원과 에너지의 무한 소비를 강제하는 이 체제로 생물권이 파괴·오염되고, 공동체가 파괴되며, 인권이 유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장기적으로, 인간다운 삶의 토대인 생태계와 자본주의체제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녹색’은 ‘성장’과 공존할 수 없다)
“정말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위한 훌륭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제비뽑기에 의해 시민의 대표를 뽑는 방법이다. 제비뽑기는 정경유착을 끊어내고, 시민의 대표들이 사심 없이 토의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합리적 방법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300년 동안 지켜냈던 방법이고,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흥륭을 뒷받침했던 방법이다.”(제비뽑기, 민주주의의 활로)
“오늘날 뒤틀린 경제의 핵심 문제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현상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금권정치가 종식되고, 사회정의가 실현되어 ‘작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발언할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올바른 정치는, 요컨대,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넓히는 데 기여하는 노력일 뿐이다.”(민주주의, ‘국민행복’의 선결 조건)
“중요한 것은 역시 공동체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공동체가 살아있는 한, 사람이 외로이 굶주려 죽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동체란 화폐의 원리가 아니라 증여의 원리에 의해 유지되는 생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절망의 땅이라는 아프리카에서도 대부분의 공동체는 다마(dama), 즉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고받는 전통적 증여경제의 틀 속에서 생명을 보호·유지하고 있다.”(증여의 원리, 삶의 토대)
“본래 인간은 토지 외에 공기와 물, 숲, 바다와 같은 공유지(혹은 공유재)를 원천으로 해서 살아온 존재이다. 토지의 사유화가 본격화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대다수 민중은 이런 공유지를 근거로 생활을 유지하고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의 형태로 지금 다시 그 공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은, 이미 막대한 생산력을 이룩한 현대 산업기술사회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기본소득’이라는 희망)
“민주주의를 살리는 것은 능동적인 시민적 행동뿐이다.”(‘패도’의 세계에서 ‘왕도’를 생각한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김새론 비보에 김옥빈 ‘국화꽃 애도’…지난해 재기 노력 끝내 물거품
[속보] 배우 김새론 자택서 숨진 채 발견
점입가경 권영세 “홍장원 메모 조작…내란 행위 없던 것 아니냐”
[단독] 노상원, 내란 실패 뒤 ‘롯데리아 준장’ 통해 비화폰 반납
김새론 비보에 유퀴즈 정신과 교수 “사회가 오징어게임 같아”
미-러, 이번주 우크라 종전 협상…트럼프-푸틴 정상회담 속도
전 국정원장 “난 영부인 문자 받은 적 없다…김건희는 별걸 다 해”
질서 Yuji [한겨레 그림판]
음식점 폐업률 전국 1위는 이 도시…집값도 급락 직격탄
[단독] 명태균 “오세훈 ‘나경원 이기는 조사 필요’”…오세훈 쪽 “일방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