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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황금 그물’을 만나는 지름길

1990년 타계한 문학비평가 김현이 죽음을 응시하며 남긴 유고일기 <행복한 책읽기> 개정판
등록 2015-12-24 20:43 수정 2020-05-03 04:28

김현(1942~90·본명 김광남)은 죽었다. 문학비평가로서 그는 “한글로 사유하며 한글로 글 쓴 첫 세대 비평가”였다. 문장가로서 그는 ‘김현체’라는 문체의 고유명사를 얻은 사람이었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로서 그는 짜장면 배달부가 그릇을 찾아갈 때 연구실 밖에서 배웅을 해주던 이였다. 날마다 시를 읽는 독자로서 그는 시인들이 기꺼이 붙잡히기를 희망한 “황금 그물”이었다. 전남 진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나는 프롤레타리아로 살 수는 없어. 성실한 부르주아로 살다 가겠어”라고 다짐한 이였다.

김현 사후 사반세기가 지난 2015년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창사 40주년이기도 하다. 김병익·김치수·김주연·황인철과 더불어 김현은 이 출판사를 출산한 인물이다. 40년을 기념해 문학과지성사는 책 3권을 내놓았다. 1992년 초판이 나온 김현의 가 새로운 장정을 달고 출간됐다.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하다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계간지 (문지) 1980년 가을호 복각본도 눈을 당긴다. 1970년 ‘문지 4K’(김현·김병익·김치수·김주연)부터 4세대를 이어온 문지 동인들의 비평문을 실은 도 발간됐다.

‘김현 일기 1986~1989’라는 부제를 단 는 김현이 돌아간 지 2년 남짓 지난 1992년 11월20일 세상에 나왔다. 실제 일기는 1985년 12월30일에서 시작해 1989년 12월12일 끝난다. 날수로는 381일치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은 초판에 견줘 몇 가지가 달라졌다. 책 끝에 ‘인명 찾아보기’를 달아, 본문에서 언급된 이들을 쉽게 일별할 수 있게 했다. 현행 한글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일부 내용을 고쳤고, 김현이 명백히 잘못 적은 것으로 확인된 것들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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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국에서는 희귀한 ‘일기문학’의 한 사례다. 외국 서적으로는 스위스의 문학자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이 쓴 와 비견된다. 치열한 독서가 김현의 내면을 곧장 들여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술을 사랑했거니와 결국 간 질환으로 마흔여덟 해 만에 만년필을 놓은 김현. 그는 이 책에 문학은 물론 철학·사회과학·영화 등에 대한 사유의 궤적을 남겨두었다. 삶의 소소한 일상도 빠뜨리지 않을 만큼 그는 섬세했다. 몇몇 문장을 추리면 이 책의 특징을 금세 알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그는 더 명징하게 사유하고자 했다.

“문장들 사이의 침묵이 점점 무서워진다.” “편지는 전화보다 훨씬 더 내면적이다.” “좋은 친구가 놀라운 것은 거기에 놀라운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다!” “나는 책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책읽기 역시 전술적이다.” “억압은 바로 사실을 사실로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지칭한다.” “시에 있어서, 감각의 깊이란 결국 삶의 구체성에 대한 실감이 아니면 무엇일까?”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부터, 단 하나의 담론이 모든 것의 우위에 있었다. (…) 그는 상징적인 히로뽕 판매자였다!” “하나가 된 소리로 같은 말을 지껄여대는 모든 것은 파시즘이다. (…)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비평가의 가장 큰 고민은 읽어야 할 책은 너무나 많고 거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너무나 적다는 것이다.” “죽음은 순간순간 온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하나의 도구와도 같다.”

김현은 죽었다. 김현은 적었다. “책-세상 읽기는 사람 읽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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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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