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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없다, 미지의 어둠 속을 헤매라”

김영란 전 대법관의 첫 책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대법관 시절 ‘반성적 회고’
등록 2015-11-28 18:01 수정 2020-05-03 04:28
김영란 전 대법관이 지난 11월16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식당에서 첫 책  출간 기념 간담회를 열고 있다. 창비 제공

김영란 전 대법관이 지난 11월16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식당에서 첫 책 출간 기념 간담회를 열고 있다. 창비 제공

대법관은 임명된 하루만 즐겁고 임기 내내 괴롭다고들 우스갯소리를 한다. 6년 재임 기간 동안 사건기록에 파묻혀서 읽고 토론하고 판결문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이 너무 신물 나서 어떤 전임 대법관은 퇴임 뒤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도 말한다. 대법관이 하루 종일 사건기록을 보는 이유는 대법관이 참석하는 소부와 전원합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되는 소부는 2주에 한 번씩 열려 사건 300~400건을 토론하고 합의한다. 대법관 전원(13명)이 참석하는 전원합의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데 원탁에 둘러앉아 아침 10시부터 저녁 늦도록 논의해 결론을 내린다. 하루에 대개 5∼6건을 논의한다.

법 해석 변화를 예고하는 소수의견

소부에선 구성 대법관들 전원(4명)의 의견이 일치해야 판결하지만 전원합의체의 결론은 다수결 원칙에 따른다. 치열한 토론 끝에 후임 대법관부터 한 명씩 자신의 결론을 밝힌다. 만약 의견이 6 대 6으로 팽팽히 맞서면 재판장을 맡은 대법원장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한다. 다만 전원합의체 판결문에는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의 이름과 내용은 공개된다. 다수의견이 어떤 논리로 도출되는지 드러냄으로써 대법원 판결의 신뢰도를 높이고, 소수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법률 해석의 변화를 예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전원합의체 판결문은 다양한 의견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이 길고 어려워서 대부분 법률가들도 결론만 기억한다. 대법관들조차 “열심히 쓴다고 한들 소수의견을 누가 읽느냐”는 농담을 나눌 정도다. 이렇게 결론만 기억되는 풍토가 안타까워 첫 여성 대법관을 지낸 김영란(59) 서강대 석좌교수가 일반인 대상의 교양서 (창비)를 펴냈다. 그는 대법관 재임 6년(2004~2010년) 동안 직접 참여했던 전원합의체 판결 86건 가운데 치열하게 논쟁한 10가지 쟁점을 골랐다. 다수의견과 반대의견, 별개의견, 보충의견 등을 소개하며 논쟁 과정을 생생하게 되살렸다.

책에서는 출퇴근 재해(9장)와 퇴직금 제도(10장)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사례부터,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대기업 지배구조(2장), 사학 비리(5장)와 찬반 여론이 팽팽한 존엄사(1장), 성소수자 차별(6장), 종교의 자유(4장)까지 다양한 판결을 다뤘다. 이 판결의 사회적 의미와 배경을 꼼꼼히 되짚고 판결 이후 사회의 변화와 개인적 소회, 반성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전·현직을 통틀어 대법관이 자신이 판결한 사건에 대해 책을 낸 것은 처음이다.

김 전 대법관은 지난 11월16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식당에서 열린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비법률가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판결을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결론에만 관심이 있고 그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은 들여다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있고, 각 시각을 충분히 알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이 ‘시민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니까 말이다.

이 책은 2013년 1학기부터 김 전 대법관이 서강대 로스쿨에서 진행한 강좌 ‘판례 실무 연구’를 토대로 했다. 그는 강의 준비를 위해 전원합의 판결들을 다시 읽으면서, 당시 판결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점을 발견했다. 그는 책머리에 “대과가 여기저기서 보였고 소과는 일일이 말하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고 적었다. ‘있을 때 좀더 잘했어야지 떠난 후의 반추가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하기도 했지만, 그 ‘아쉬움을 가감 없이 담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책을 내기로 했다. 특히 비슷한 외국의 사례나 책, 영화 등과 우리 판결을 비교·대조해 비법률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

“삼성 사건 판결 형식 내세워 본질 벗어나”

특히 삼성그룹의 신주 저가 발행을 통한 지배권 세습을 다룬 ‘삼성 사건’(2009)과 사학 비리로 물러난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의 복귀를 도운 ‘상지대 사건’(2007)을 완곡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했다. 김 전 대법관은 삼성 사건에서 다수의견은 ‘주주 배정’이냐 ‘제3자 배정’이냐라는 형식만 내세우고 본질을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의 근본은 주식회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사실상 지배주주의 개인 기업처럼 운영되는 우리나라의 재벌 형태에 대해 법적 처벌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형식을 갖췄으니 괜찮다는 논리는 재벌들의 개인 기업적인 운영 행태에 대한 법적 평가를 논할 필요 자체를 처음부터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시각도 있다.”

상지대 사건의 경우 김문기 등 이미 퇴임한 이사들이 이후 상지대의 정식이사 선임과 관련해 이해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다수의견의 논리가 기존 민사소송법상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창의적 발상’이라고 평했다. “흔히 진보적 법 해석을 공격하는데 즐겨 사용되는 ‘사법적극주의’의 극단적 발로라는 지적이 있다.” 창의적 발상의 밑바탕에는 학교 설립자에게 정식이사 선임의 효력을 다툴 수 있는 길은 열어줘야 한다는 당위성이 깔려 있다고 김 전 대법관은 짐작했다. 다수의견은 이후 2013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사실상 부정됐다. “(대법원이) 사학의 자유가 시스템에 의해 보호될 수 있는 방향으로 보다 진전된 구상을 내놓았더라면 한결 좋은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대법관 시절 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과 함께 ‘독수리 5남매’라 불리며 사회적 소수자의 시각을 중시했던 김 전 대법관은 책에서도 판사의 역할을 ‘소수자 기본권 보호’라 정의했다. 다수결 원리에 따라 선출되는 국회의원은 선출해준 사람들의 생각을 거슬러서 소수자 집단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기가 어렵지만 선출되지 않고 임명되는 판사는 소수자의 기본권을 선언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주권의 원리, 기본권 보호의 원리 등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는 소수자까지 포함해 보호하는 원리이므로 판사들이 이 ‘근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적 시각과 법률적 시각이 부딪칠 때 판사들은 ‘기-승-전-헌법’ ‘기-승-전-국민주권’을 생각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기-승-전-헌법, 기-승-전-국민주권

김 전 대법관은 또 “법의 해석과 적용에는 확실한 정답이 없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늘 정답을 찾으려 하지만 옳고 그름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며, 법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매달리거나 법의 원리를 형식적으로만 해석하고 적용하면 국민주권, 기본권 보호의 원리가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는 맺음말에서 이렇게 소망했다. “이 책이 법에도 미지의 어둠이 있으며, 그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은 미지의 미래를 뚫고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면 다행이리라.”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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