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어느 출판사에 1년간 있었다. 부도는 2011년이었지만 편집자로 근무했던 무렵에도 사장은 “위기”라며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여러 번 쓸었다. 침울한 점심 자리에서 팀장은 “월급은 나오잖나. 자금 회전이 안 돼도 제일 먼저 월급을 챙겼다”고 말했다. 회사는 월말이면 밀어넣기를 했다. 어음이 돌아오면 책으로 덮었다. 하지만 월말 어음이 돌아올 때마다 그 검은 입을 통째로 막아줄 대작이 있을 리 만무다. 1~2년 전쯤 나온 작품이 다시 불려왔다. 좀더 새롭게 보이기 위해 판형을 달리했다. 제목을 바꿨고 시리즈 속으로 집어넣기도 했다. 다시 제작될 때는 양장이었다. 무선 제본과 제작비는 별 차이 없지만 가격은 높이 매길 수 있다.
김훈 ‘세설’(世說)이 그렇게 급하게 여러 번 불려나왔다. 2002년 3월 가 나왔다. 2003년 6월 이 나오면서 ‘김훈 세설’이라는 말이 붙었다. 2004년 3월 는 제목을 달리하여 로 나왔다. 같이 도 표지 갈이를 했다. 두 권은 다시 2007년 3월 표지 갈이를 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00만 부를 기념하는 사은본 세트에 두 권이 포함되면서 다시 표지가 달라졌다. 4년 만에 새로 나온 김훈의 산문집 은 글이 많이 부족했던 듯하다. 교도소 앞에서 사위 김지하를 마중하러 온 박경리를 관찰하는(1975년 2월15일의 박경리) 글이 화제가 되었지만 여러 소설과 수상 소감을 끌고 와 책의 반을 채웠다. 수상 소감까지 알알이 책 속으로 들어가서 독자들을 다른 얼굴로 여러 번 만날 수 있었으니 김훈만큼 행복한 작가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나 출간은 다시 세보지 않는다.
속되게 말해 김훈은 출판사의 밥줄이었다. 작가는 자주 불려간 유명의 괴로움을 불평하진 않은 것 같다. 절체절명을 모른 체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문학동네 펴냄)를 출간하며 김훈은 단호하다. 책 앞 일러두기는 이렇다.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 는 에서 가려 뽑고 새로운 글을 보탠 것이다. 새로 보태진 글은 ‘라면을 끓이며’ ‘바다’ ‘남태평양’ ‘국경’ ‘세월호’ 다섯 편. 몇 편 안 되지만 양이 길어 개고하고 추가한 글을 합쳐 새로운 글의 양은 출판사에 따르면 400매, 책의 30%에 이른다고 한다.
‘라면을 끓이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감동으로 부르르할 것이다. 물을 넉넉히 부으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양을 정확하게 가늠해 700㎖ 네 컵을 부으라 하는 말에,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하듯 라면이 편안하게 익는다는 말에 웃음이 머금어진다. 김훈이 ‘먹방 시대’에 맞게 구부러진다는 것도 의외다. 하지만 이 글은 아무리 봐도 요즘 글이다. 예전의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는 제목이 삭둑 잘려 ‘평발’이 되었는데, 이 글은 아무래도 2002년의 맛이다. 책의 글들은 어디서 왔는지, 언제를 배경으로 쓰였는지 명확하지 않게 주제별로 쌓였다. ‘세설’은 뭉개져 ‘설’이 되었다. 모든 걸 새롭게 보이게 하는 것이 속세의 룰이다. 그또한 옛날과 다를 바 없는데, 김훈이 자주 쓰는 말대로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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