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떤 유능한 행정병 골리앗

톰 골드의 <골리앗>
등록 2015-09-24 21:22 수정 2020-05-03 04:28

구약성서의 ‘사무엘 상’ 제17장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의 가호를 받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260cm가 넘는 완전무장한 블라셋의 장군을 물맷돌 하나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기독교 세계에서 다윗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연약한 존재도 용기를 잃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이길 수 있다는 통쾌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아왔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서 속 이야기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기존 관념과는 다른 골리앗이 나타났다. 영국 작가 톰 골드의 (이봄 펴냄) 속 골리앗은 피칠갑의 전사가 아닌 겁 많고, 냇가에 떨어진 조약돌과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소녀 감성의 청년이다. 하지만 골리앗은 그 태산 같은 덩치 때문에 군으로부터 심리전의 도구로 이용된다. “저는 문서업무를 해요! 저는 유능한 행정병이라고요.” “핵심을 놓치고 있군, 골리앗. 자넨 전사처럼 보여.”

그는 방패와 창, 갑옷으로 과장되게 포장되어 밤낮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싸움을 거는 위험한 임무를 맡는다. 싸움을 못하는 골리앗은 정말로 누군가 나타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회로부터 내몰린 그는 홀로 지내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다.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따리를 싸지만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소문은 골리앗의 이미지를 점차 괴물로 몰아간다. 심지어 매일 함께 지내는 유일한 단짝인 방패지기 소년조차도 그 풍문을 믿는다. 결국 골리앗은 다윗에 의해 죽음을 맞음으로써 그를 옥죄고 있던 임무로부터 해방된다.

톰 골드의 은 자극적이지 않고 화려한 맛이 없다. 대화나 행동도 담백하고 간결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작품 전체가 하나의 주제와 감성으로 똘똘 뭉쳐 있어 강한 힘이 느껴진다. 또한 작가는 색과 배경, 그리고 여러 사물을 통해 골리앗의 심경을 세련되고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톰 골드는 시각적 매체인 만화에 서정적인 시 한 편을 근사하게 담아냈다. 게다가 한국어판 번역은 시인 김경주가 맡아 이 작품이 가진 섬세함을 예리하게 전달한다.

은 그 자체로도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지만 사고 전환의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이 작품은 ‘승자의 역사’를 거부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한 작품은 아니다. 다만 작가가 자유롭게 창조한 하나의 픽션일 뿐이다. 그러나 톰 골드가 그린 순박한 골리앗은 지금까지 우리가 받아들여온 골리앗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두 명의 골리앗이 격돌하는 가운데 고정관념이 ‘생각의 눈가리개’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태다운·이하규 해바라기 프로젝트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