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오늘은 웬일인지 초저녁부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분이 일찍 저녁잠에 드셨기 때문이다. 지난 1년 사이 모든 일상이 슈퍼갑 아기에게 맞춰져 있다보니 집주인도 제리 형님도 나도, 모두의 시간이 헝클어져버렸다. 그분이 오시고 이 집에는 알람 시계가 사라졌다. 그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그냥 다 같이 일어나면 된다. 아기보다 일찍 일어날 일이 있어도 알람 시계 사용은 불가하다. 그분이 깨어나면 안 되므로. 그냥 마음속에 아침 6시 알람을 맞춰놓고 정신력으로 일어나는 거다.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또 사이렌이 울린다. “어빠빠빠 끼악~(나랑 제발 한 번만 놀아줄래?).” 소리를 지르며 엉금엉금 기어오는데 이건 뭐랄까, 오래전 그 시절 수준의 공포다. 뽀얀 얼굴의 그분 모습에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붙는 백상어의 얼굴이 때때로 겹쳐 보인다. 도망가면 쫓아온다. 안방으로 거실로 베란다로. 나를 더 빨리 쫓아오기 위해 저분은 곧 걸을 기세다.
어쨌거나 이렇게 그분이 주무시면 우리도 결리는 어깨와 허리를 두드리며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다. 장난감이 엉망으로 널려 있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노라면 이게 무슨 신세인가 싶다. 나는 누구인가, 보모인가 고양이인가.
고양이는 누구보다 고독을 추구하는 존재다. 외톨이의 특성을 타고난 고양이에게 이분은 자꾸만 유대를 요구하시니 나는 요즘 너무 피곤하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고양이의 습성을 이분은 철저히 파괴한다. 아늑한 구석에서 눈을 좀 붙일라치면 꼭 같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러니 때로는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인간 세상에 왜 ‘가출’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알겠다. 하지만 겁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굳이 고행을 자초할 리 없다. 이 집구석에서 좀 사라질 곳이 없나. 그렇게 지난 몇 달간 탐험가의 심정으로 찜해둔 몇몇 장소가 생겼다. 이 글을 읽는 고단한 고양이들을 위해 큰맘 먹고 공개한다.
첫째, 집주인이 장롱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 틈을 타서 얼른 들어가라. 영화에서도 장롱 문짝 열고 들어가 숨어 있다가 다른 세계로 빠지곤 하지 않나. 그분이 쫓아 들어올 수 없는 이곳이야말로 다른 세상, 파라다이스. 그런데 장롱의 단점은 들어갈 때는 쉬워도 나올 때 좀 버겁다는 거다. 아무리 울어도 집주인이 문을 열어줄 기색이 없어 몇 번 머리로 문을 밀치고 나왔다. 차력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두 번째로 추천하는 공간은 커튼 뒤. 드나들기가 편하다. 하지만 나처럼 뚱냥이에게는 이 공간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꼭 꼬리든 발이든 삐죽 나온다.
너무 뻔하다고? 들킬 수밖에 없겠다고? 그래서 어젯밤에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집주인 등 뒤, 비어 있는 책장 한 칸에 들어앉아 있었다. 2시간쯤 지났나, 집주인이 내 앞을 몇 번을 왔다갔다 하며 장롱 속, 커튼 뒤, 베란다 구석 따위를 찾아헤매더니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대는 것이다. 오예, 그렇구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었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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