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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털로 지구정복?

털갈이 계절
등록 2015-02-13 12:47 수정 2020-05-03 04:27
신소윤

신소윤

내 이름은 만세. 고양이다.

해가 차츰 길어지는 눈치인데 봄이 오려는 걸까. 계절이 바뀌니 나의 두꺼운 털코트도 이제 벗어놓아야겠구나.

털갈이의 계절이 왔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에게 수족 같은 생활 도구가 있다. 한 손엔 청소용 테이프 롤러, 다른 손엔 물티슈. 세상 불가사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치워도 오늘도 어제처럼 고양이 털이 한 움큼 빠져 방바닥을 뒹굴고 있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양손에 청소 도구를 쥐고 수선을 떨어도, 남자 집주인이 사냥에 실패한 고양이처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밤중 집으로 돌아와 촘촘한 빗으로 내 등을 긁어내려도, 고양이 털은 어느 구석에서든 끝끝내 비집고 나온다. 여러분은 외출 전 부지런히 테이프 롤러를 굴리며 검은색 외투 위에서 반짝이는 고양이 털을 말끔하게 제거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집 안에서는 멀끔해 보이던 옷이 햇볕 아래만 나가면 미처 떨어지지 않은 털들이 여기저기. 그러니 고양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털과의 전쟁, 털과 동고동락, 털과 백년해로해야 한다는 얘기란 말씀.

사실 오늘 하려던 이야기는 끈끈하기로 울릉도 호박엿에 버금가는 무적의 털부대를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동물행동학자들의 수십 년 관찰 결과를 뒤집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드려야겠다. 우리는 사실 여행을 사랑하는 동물이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데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강아지처럼 주인 발꿈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낯선 곳의 바람을 느끼는 것을 경계하는 동물이라 알고들 계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경기도 오산이다.

우리 털이 집주인의 옷에서 끝끝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방랑벽 때문이다.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늘을 지붕 삼아 구름을 벗 삼아 정처 없이 떠도는 김삿갓 같은 이들이다. 1980년대 어린이들을 열광시켰던 만화 는 아마도 고양이를 잘 아는 사람이 지은 이야기인 것 같다. 머리털을 훅 불면, 새가 되고 나비가 되거나 머털이의 분신으로 변신해 먼 곳을 떠도는 그 이야기처럼 고양이들도 집주인 옷에 붙어 나가 세상 구경을 한다. 집주인은 얼마 전 여행에서 자기 옷에 붙은 내 털을 뽑으며 “만세가 여기까지 따라왔네”라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이렇게 우리는 지구 끝까지도 여행한다. 당신의 옷깃에 살포시 숨은 우리의 털은 공항 검색대도 거르지 못한다. 당신이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을 지키고 있던 고양이가 당신보다 더 피곤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분신이 당신의 여정을 부지런히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털갈이 시즌이라는 핑계로 더 많은 털을 뿜어대는 이유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새 계절 콩닥대는 마음으로 우리는 당신의 뒤를 더 많이 좇고 싶다. 그러니 어서 봄이 왔으면. 민들레 씨앗처럼 집주인의 어깨에 엉겨붙어 폴폴, 세상을 구경해야지.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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